하지만 제도적 틀을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 기업에만 초점을 맞춰 논의가 진행되다 보니 오히려 지속가능한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를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文 "스튜어드십코드 적극적으로 행사" 힘실어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영위원회(이하 기금운영위)는 다음달 1일 전체회의를 열고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미 지난 16일 전체회의에서 참석자 12명 가운데 재계를 대표하는 2인을 제외한 10명이 해당 안건에 찬성한 만큼 큰 이변이 없다면 다음 회의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23일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위법에 대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며 힘을 실었다.
다만 변수는 있다.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를 위한 자문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이하 수탁자책임위)가 지난 23일 해당 안건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수탁자책임위는 29일에도 긴급회의를 열었지만 경영에 참여하는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는 반대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기로 했다.
◇ 재계 반대하지만 스튜어드십코드 당위성 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 130조원 가량을 투자하고 있는 큰손으로 지난해 연말 기준으로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상장기업은 297개, 10% 이상은 81개에 달한다.
이번에 스튜어드십코드 행사의 첫 사례가 될 대한항공의 지분은 11.56%를 보유해 2대 주주로 이름을 올렸고, 한진칼의 지분은 7.34%를 보유한 3대 주주다.
그만큼 국내 굴지의 대기업 가운데 국민연금이 2,3대 대주주인 기업들이 많아 국민연금이 이들 기업에 대해 적극적인 경영참여에 나설 경우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전반적으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행사에 내심 반대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에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는 대한항공에 한정된 경우라 다른 기업들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며 "처음이 어렵지 물꼬가 트이면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튈 수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재계의 우려에도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은데다 연이어 터져나온 재벌그룹 총수일가의 전횡 등으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는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대한항공과 한진칼 총수일가의 경우 수사기관의 수사를 통해 이미 각종 전횡이 사실로 드러난 만큼 스튜어드십코드 행사의 첫 사례로 안성맞춤이라데는 이견의 크지 않다.
◇ 중요 사안도 미리 안챙긴 국민연금 '비판 자초'
다만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논의부터 시작해 많은 시간이 있었지만 제도적 기반을 미리 마련해놓지 않고 특정 기업의 상황에 맞춰 스튜어드십코드 행사가 논의되는 점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당시에도 행사범위를 배당관련 주주활동으로 제한했다가 반발여론이 일자 '심각한 기업 가치 훼손'이라는 전제를 달아 경영권 참여로 선회하는 등 우왕좌왕한 바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한항공에 대한 스튜어드십코드 행사 결정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수익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위 '10%룰' 등 중요 사안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논의가 급물살을 탄 측면이 크다.
자본시장법상 지분 10%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단순투자' 목적인지 '경영참여' 목적인지를 공시해야 하며, 경영참여 목적인 경우 6개월 안에 단기매매차익을 해당 기업에 돌려줘야 한다.
수익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전에 미리 관련 규정을 수정하거나 대안을 마련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갖췄어야 하지만 국민연금은 최근에야 금융위원회에 관련 사안에 대한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결국 금융위가 30일 국민연금도 지분 10% 이상을 보유하고 경영참여 목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면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해야 하는 10%룰을 예외없이 적용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여기에 보다 근본적으로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영위에 보건복지부 장관(위원장)을 비롯해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임명하는 인사들이 포진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독립성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다.
◇ 정권영향 안받는 '제도화' 우선돼야
국민연금은 정부 재원이 아니라 국민들의 노후자금을 정부가 일정기간 맡아 운영한 뒤 다시 돌려주는 제도라는 점에서 정권에 따라 운용원칙이 바뀌어서는 안된다.
이 때문에 비록 현정부 들어 도입됐더라도 향후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는 흔들림없이 독립적이어야 하고, 또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특히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의 '선의'에만 맞겨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스튜어드십코드 행사 관련 논의는 그동안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기업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춰 즉흥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를 놓칠세라 스튜어드십코드 반대세력들은 '연금사회주의'라는 프레임을 걸어 공격하고 있고, 이는 정부와 국민연금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이와 관련해 금융소비자원 조남희 원장은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에 100% 동의한다"고 전제하면서도 "현 상황을 보면 정부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향후 스튜어드십코드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스튜어드십코드라는 중요 정책을 제도화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이번처럼 건별 위주로 대응하다 보면 부작용만 남게되고, 이는 결국 반대론자들의 저항을 받게돼 다른 정책들 처럼 향후 정권이 바뀌면 흐지부지 되는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