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핼쑥한 모습이었지만 의식은 비교적 또렷해 보였습니다. 손발은 계속 움직였고 눈도 어설프게나마 뜨고 계셨습니다. 귀에 대고 "할머니 들려요?"라고 크게 물었더니 이내 "응" 하고 짧게 대답하셨습니다. 어딘가 불편하시다면 다리를 세우거나 몸을 비틀어 표현하셨습니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본관 병동. 병상에 누운 백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계셨습니다.
의료진은 "대장암에서 비롯된 암세포가 이제 온몸에 퍼져 의료진도 별달리 손쓸 여지가 없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여러 차례 입·퇴원을 반복하다, 사흘 전 피를 토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져 서둘러 병실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식사마저 어려워지시면서 팔에 관을 꽂아 수액 방울을 투여받아야만 하셨습니다.
그런 할머니께 무슨 말을 드릴 수 있을까 막막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그동안 하신 말씀, 다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운을 뗐지만 이어갈 말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숭고한 93년의 삶을 감히 한두 마디에 정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죽음을 이렇게 면전에서 기정사실로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할머니 곁을 지켜온 독립언론 미디어몽구의 카메라가 켜진 것도 부담이었고요.
한참을 머뭇대다 끝내 용기를 낸 건 병실 문을 나서기 직전이었습니다.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다시 들어가 "그동안 말씀에 감명받았습니다. 존경한다는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요. 다시 오겠습니다. 쉬세요"라고 했습니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다 알아들으신 눈치였습니다.
2주 만에 다시 찾은 병실의 공기는 더 무거워져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더욱 앙상해져 계셨고, 극심한 통증에 '끙끙' 하는 신음을 자주 내셨습니다. 눈은 거의 감고 있다시피 했고, 배는 복수가 차 불룩해진 상태. 몸에서 나온 검붉은 분비물은 코로 연결된 관을 통해 배출됐는데 일부는 침대 시트와 목 주변에 튀어 있었습니다.
28일 밤 8시. 할머니 쪽에서 별안간 우물우물하는 소리가 들리자 병실에 있던 모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지 연신 입을 떼려 하셨지만 힘이 없어 목소리를 내시지 못했습니다. "진통제 올려달라고 할까요?"라고 묻던 간병인의 질문에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다시 할머니를 바라봤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아직은 조금 더 버티시겠지 싶어 별 말 없이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그게 제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날 밤 10시 41분 김 할머니는 끝내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홀연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임종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할머니를 목도한 증인이라고, 이제는 옆에 안 계시겠지만 그 증인들이 살아서 남은 몫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준비했지만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생전 그를 돕던 윤미향 이사장 등 정의기억연대 사람들, 미디어몽구와 마리몬드 관계자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못다한 말들은 빈소에서 마저 전하렵니다. 여러분께서도 할머니께 못다한 말이 있으시다면 빈소를 찾아 하실 수 있습니다. 빈소는 29일 오전 11시부터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차려집니다. 누구나 조문이 가능한 '시민장' 형식이니 자리를 채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발인은 다음 달 1일. 서울광장과 일본대사관을 거치는 노제를 진행한 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장지를 마련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