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나흘째였던 지난 15일 세브란스병원으로 김 할머니를 찾았던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동아리 '평화나비' 회원 김샘(27)씨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발해 일본대사관에서 시위를 벌인 혐의 등으로 경찰에 연행됐다 풀려났을 때 김씨를 안아주고 위로해준 사람도, 재판에 넘겨진 뒤 법원에 탄원서를 써준 사람도 김 할머니다.
김씨는 정기 수요시위가 시작된 1992년에 태어났다. 그는 당시 병실 앞에서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27년 동안의 시위에도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참 많은 것을 바꿨다는 사실을 병실에서 말씀드렸다"고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여자들'로 여긴 폭로 당시 사회적 시선을 '함께 해결해야 할 국민적 의제'로 바꾸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 사람이 김 할머니란 생각에서다.
김씨는 "할머니의 증언은 한국사회의 첫 번째 '미투'였다"며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진 폭로로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좀 더 잘 안아줄 수 있게 됐고, 공감과 연대를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병실의 김 할머니에게 "돌아오는 생신날 '평화의 우리집'에서 잔치를 열자"고 했던 김씨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서로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았던 연세의료원노조와 김복동 할머니의 인연은 10년도 넘는다.
영양 상태를 살피고 수액주사를 놔드리는 진료 활동이 자리 잡으면서 할머니가 계시는 평화의 우리집에 노조가 가는 것도, 할머니가 세브란스병원에 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권미경 위원장이 김 할머니의 마지막 17일을 거의 매일같이 찾아뵌 것도 당연했다.
'까칠'한 김 할머니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눈 건 불과 3~4년밖에 안 됐지만, 그때부터 할머니가 쌈짓돈을 꺼내 사준 자장면과 치킨, 또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자꾸만 넣어주시던 용돈은 잊힐 수 없다.
비슷한 나이의 외할머니가 있었던 권 위원장은 김 할머니를 "같은 상처를 갖고도 말할 수 없었던 그 시대 수많은 여성을 치유해주기 위해 몸소 나선 용기있는 여성"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에 "힘써서 (화해치유재단) 문제를 해결해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던 할머니는 이 인연을 계기로 받은 문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이른바 '이니시계'도 노조에 건넸다.
찬장 안에 고이 둔 시계처럼, 노조가 할머니에게 사드린 군청색 니트는 결국 받은 그 날 하루밖에 쓰이지 못한 채 고이 개켜져 있다.
김복동 할머니의 '이니시계'를 건네받은 또 한 사람은 '내 손자'로 불렸던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 김정환(41)씨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이 시위에 나갈 때 쓰던 고장 난 승합차를 새로 바꿔드리는 모금 활동에 나섰던 걸 계기로 인연을 맺은 김씨에게 김 할머니는 '재롱을 웃음으로 받아주시던 최고령 후원자'였다고 한다.
마지막 입원 기간 매일같이 병실을 지키며 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영상에 담았던 김씨는 할머니를 '삶의 교과서'라고 불렀다.
"김 할머니는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매사에 진심을 담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았다"는 김씨는 "할머니의 당당함과 굳건함을 이어받고 싶었는데, 숙제로 남고 말았다"고 말했다.
지난 1992년 김 할머니가 처음 세상에 위안부 피해 폭로를 했던 당시부터 인연을 맺어온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는 할머니를 '세계무력분쟁지역 성폭력 생존자들의 영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복동' 하면 우간다 내전 성폭력 피해 여성들도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로 얘기할 정도"라고 설명한 윤 대표는 평화와 인권, 그리고 통일까지 김복동 할머니가 남겨둔 메시지가 이젠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