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지상주의가 낳은 한국 체육의 병폐가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쏟아졌고, 이참에 엘리트 스포츠를 혁신해 전반적인 스포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명제가 시대적인 요구로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체육계 '미투'(나도 당했다) 고발을 접한 뒤 지난 14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성적 향상을 위해 또는 국제대회의 메달을 이유로 가해지는 어떤 억압과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면서 "체육계의 성적 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위주의 육성 방식에 대해서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개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체육계의 쇄신을 주문했다.
여성가족부, 교육부와 더불어 공동 대응에 나선 문화체육관광부의 도종환 장관은 "더는 스포츠의 가치를 국위 선양에 두지 않겠다"면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최선을 다해 뛰고 달리며, 상대방을 존중하고, 결과에 승복하며,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본연의 스포츠 가치를 구현하겠다"며 인식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대한체육회와 정부는 위력을 앞세운 지도자의 선수 폭행·성폭행이 도제식 교육을 앞세운 체육계의 수직적인 문화와 폐쇄적인 합숙 훈련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합숙 훈련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개선 대책을 잇달아 내놨다.
그러나 체육인들은 침묵과 방조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입지를 좁힌 사실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최근 발표된 일련의 대책이 현장 체육인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내용이라는 점을 우려한다.
특히 올해는 도쿄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종목별 국제대회가 많이 열리는 해여서 합숙 등 훈련 시스템을 당장 바꾸기도 어려운 형편이나 변화를 바라는 사회의 시선을 외면할 수도 없어 엘리트 체육인들의 걱정이 크다.
체육인들의 반응을 요약하면 가장 큰 고민은 합숙 폐지 또는 축소에 따른 국제대회 성적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체육회 회원종목 단체의 한 고위 임원은 최근 "합숙 훈련을 점진적으로 폐지하려는 정부 시책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면서 "이젠 대표 선수들도 소속팀에서 훈련하다가 선수촌에선 한 달 정도 모여 호흡을 맞춘 뒤 대회에 나갈 수밖에 없는데 이러면 성적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고 단언했다.
소속팀 훈련보다 대표팀 장기 합숙 훈련에 익숙한 선수들이 급격히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국제대회에서 절대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지도자들의 생각이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는 메달의 산실인 태릉선수촌·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합숙 형식의 집약된 훈련을 거쳐 스포츠 강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부 종목에서 드러난 합숙의 폐해가 마치 전 종목에 만연한 것처럼 비치는 걸 체육인들은 불편하게 인식한다. 분명 합숙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도 장관의 발언처럼 스포츠 본연의 가치는 공정한 경쟁과 깨끗한 승복을 통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기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스포츠의 주인공인 국가대표 선수들은 스포츠의 또 다른 본성인 반드시 이겨 시상대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목표를 안고 싸운다. 그래서 체육인들은 합숙이라는 지난한 과정은 아주 힘들지만, 금메달의 영광을 위해선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여기기도 한다.
스포츠를 관전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보다 최선을 다한 선수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요즘 달라진 시대상이긴 하나 금·은·동메달로 순위를 결정하는 스포츠의 본질상 선수 자신이 목표 달성을 위해 스스로 선수촌 합숙을 바라기도 한다.
2017년 9월 문을 연 진천선수촌은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새 요람이다.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터전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합숙 훈련을 일방적으로 축소 또는 폐지하면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한다. 큰 잡음 없이 대표팀을 운영해 온 종목과 선수촌에서의 합숙을 간절히 원하는 선수들이 잠재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체육회의 한 관계자도 "올림픽 출전 하나만을 바라보고 땀을 흘려온 선수들이 선수촌에 많이 있다"며 "이런 선수들에게 당장 합숙 축소를 적용할 순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경쟁에 내몰리지 않도록 어린 학생 운동부 선수들부터 점차로 합숙을 줄여가는 게 현실적이라고 이 관계자는 조언했다.
현재 국가대표 선수 등 현장 체육인들과 훈련 방식에서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정부 주도로 발표된 체육계 폭력·성폭행 대책은 자칫 엘리트 스포츠 붕괴에 따른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위상 약화로도 이어질 수 있어 좀 더 정교하게 세부 시행세칙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남북이 2032년 하계올림픽을 공동 개최하기로 도전장을 내민 터라 개최국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종목별 국제경쟁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력을 상실한 종목이 다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체육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엘리트 체육에서 생활 체육 쪽으로 선회했다가 경쟁력을 잃자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안방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다시 국가대표의 선수촌 훈련을 시작한 일본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