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는 시청률로만 본다면 그리 주목할 만한 작품이 아니다. 가장 높은 시청률이 6%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붉은 달 푸른 해'는 시청률만이 드라마의 가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다.
아예 안 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꾸준히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붉은 달 푸른 해'는 정말 잘 쓰인,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붉은 달 푸른 해'는 아동학대를 소재로 삼았지만, 피해자의 아픔을 선정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점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시청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에서 이이경도 시청률보다는 작품 자체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시청률은 하늘이 내려준 숫자라면서도, "변함없는 시청률이라는 게 좋았다"고.
본인이 봐도 대본이 어려워서 중간 유입이 힘들 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도, '의리'가 있는 것 같다며 시청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언젠가 회자가 될 거고, 웰메이드 수식어 붙여주셨는데 기분 좋은 말인 것 같아요."
◇ 처음엔 잘 읽히지 않았던 대본
이이경은 올리브 예능 '국경없는 포차' 촬영차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처음 스마트폰으로 '붉은 달 푸른 해' 대본을 받아봤다. 파리에서, 비행기에서 보았던 대본은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 출력해서 꼼꼼하게 체크하고 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스마트폰으로 슥 넘겨보기에는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이이경은 "이 정도로 어려운 대본이면 질문에 제 답을 생각해야 하고, 저도 질문을 뭔가 만들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준비해 갔는데 감독님이 그걸 좋아하셨다. 저희 쪽에 선택의 시간이 왔을 때 자신은 없었다"고 밝혔다.
검사와 법의학자의 만남을 다룬 장르물 '검법남녀'가 최근작이었으나, 그 바로 전에 찍은 '으라차차 와이키키'에서 온몸을 던져 웃음폭탄을 만든 이이경이었다. 때로는 뻔뻔하기까지 한 밝고 시끄러운 캐릭터로 주목받다 보니, 고민이 됐다. 이이경은 '이 정도 깊이와 톤의 대사를? 왜 날 캐스팅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케세라세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독특한 분위기와 분명한 메시지를 선보였던 도현정 작가의 대본을 직접 본 소감은 어떨까.
"사건을 두고 얘기할 때, 다이렉트로(직접) 말할 수 있는데 계속 주변을 도세요. 그게 분위기인 것 같아요. 누굴 취조한다고 하면 그냥 물어보면 되는데 은근히 떠본다고 해야 할까요. 우경이(김선아 분)랑 얘기할 때도 결국 마지막 한 대사를 위해서 분위기를 갖고 가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의 감정을 쌓아 올려 주는 게 있거든요. 확실히 대사하기가 어려운 게, (대사대로라면) 다 물어보는 말밖에 안 돼요. 마지막 한 대사 때문에 필요한 거죠. 그런 점이 다른 것 같아요."
◇ '붉은 달 푸른 해' 마지막 회는 여러 버전이었다
이이경은 최정규 감독에게도 거듭 감사를 표했다. 배우들이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감독님께 감사한 게 제일 많아요. 모든 감독님이 물론 저보다 더 깊게 작품을 보시겠지만, 영화는 콘티가 있고 준비 기간이 있잖아요. 드라마는 콘티북이 따로 없고요. 그런데 (콘티가) 정확하게 감독님 머릿속에 있었어요.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연출력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체적인 그림이 명확하게 있으셨어요. 뒤로 갈수록 대본에 쫓겼는데도 감독님이 대본을 쉽게 안 푸셨어요. 본인이 작가님이랑 충분히 얘기하고 수정해서 배우들한테 줄 수 있는 상황에서 주시더라고요. 마지막 회는 수정이 많이 돼서 대본을 (버전별로) 3~4개 갖고 있었어요. 대화도 많이 하시고, 의견도 잘 수렴해주시고. 연기할 때도 편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카메라는 쫓아가겠다고."
마지막 회 대본이 여러 개 있었다는 말을 들으니 작업물 마감할 때 흔히 붙이는 '최종.txt', '진짜_최종.txt'이란 제목이 떠올랐다. 대본이 어느 정도로 바뀐 건지 묻자 이이경은 "어떻게 보면 많이 바뀌었다"고 답했다.
우경이 엄마를 집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나, 지헌이 태주를 취조하면서 걷어차는 장면도 다 처음엔 없었다. 찍은 걸 재촬영하고, 찍은 게 방송엔 안 나오기도 하고, 없어졌다 다시 나오기도 했단다. 마지막 회 완고 자체를 늦게 받아서 A4 용지 보고 촬영했다.
"저 찍을 때 너머에 조명, 카메라 스태프분들 엄청 많거든요. '최소 인원만 남기고 다 나가세요' 이러셨어요. 음향(장치)도 (배우에게) 다 달고 조명도 설치해놓고 집중할 수 있게 다 만들어주셨어요. 한 테이크만에 다 끝났어요. 이 분위기도 감독님이 다 해 주셔가지고… 정말 집중이 잘될 수밖에 없어요. 카메라는 녹화 눌러놓으시고 '자, 지헌이 형, 우경이 형 카메라 돌고 있어요. 준비되면 하세요' 하시는 거예요. 저희를 형이라고 부르시거든요. 5분이 됐든, 10분이 됐든 마음속에 정리가 됐을 때 하면 돼요. (한) 씬이 A4 3장 반인가 그래서 끊어갈 수 없는 거예요. (연기에 집중할 분위기를) 다 감독님이 만들어주셔서, 정말 고개 들면 상대방밖에 안 보일 때쯤 집중력을 높인 채로 연기했어요."
'붉은 달 푸른 해'에선 붉은 울음이라는 존재가 나온다. 아동학대 가해자만 죽이는 연쇄살인범이다. '붉은 울음'의 정체는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언제쯤 붉은 울음의 정체를 알았냐고 했더니, 이이경은 "저희가 스페셜 방송이 한 번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촬영할 때 우경 누나(김선아)가 '태주가 범인인 것 같아! 맞다니까~' 하시더라. 저도 느끼긴 했었는데, 태주 형(주석태 분)도 스케줄표 알았다고 하시더라. 본인도 몰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이이경이 말하는 동료 김선아와 차학연
이이경은 난해한 대본을 체화하기 위해 열심히 '사전 작업'을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최 감독과 김선아까지 셋이 만나서 대본을 연구했다. '붉은 달 푸른 해'에서 처음 만난 '배우'이자 '동료'인 김선아는 어땠는지 궁금했다.
"작품에 대한 애정도가 다르세요. 임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는 걸 느낀 게, 저한테도 '이경아. 너 후회할 일 없을걸? 이거 잘한 거야. 대본 봤어? 대박이지~' 하셨어요. (웃음) '우리 드라마 진짜 예술이지 않아? 아, 대박이야' 하면서 자신감과 확신을 심어주시고요."
호흡도 잘 맞았다. 나중에는 대본을 보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겨도 즉석에서 둘이 상의해 더 나은 시도를 매끄럽게 해낼 정도였으니.
그는 "실제 성격도 좋다. 촬영하기 전에 화보를 하나 찍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저와) 잘 맞는 친구인지 몰랐다. '다음 주쯤 형네 집 가도 돼?' 이런 사이가 됐다"고 밝혔다. 조만간 같이 치킨을 먹기로 했단다.
이이경은 차학연에 대해 "다재다능을 뛰어넘는다. OST가 나왔는데 중간중간 들려줬다. 대본도 얘기하고… 앞으로 배우로서 더 기대되는 친구다. 일단 목소리가 너무 좋다. 미성 같은데 진성이 느껴지면서 딕션도 정확하고… 이 정도면 팬인 것 아닌가. 팬 미팅 제 자리 하나만 달라고 했더니 '개인 팬 미팅 때 와~ 형은' 이러더라"라고 전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