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경남CBS<시사포커스>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 제작 : 윤승훈 PD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
◇김효영> 올해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을 찾는 작업도 이뤄지고 있는데요.
여성 장군이 한 분 계십니다. 김명시 장군인데요. 이분에 대한 서훈이 신청됐습니다. 서훈신청을 한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영만> 반갑습니다.
◇김효영> 김명시 장군이 어떤 분인지부터 이야길 해야겠습니다.
◆김영만> 조금 생소하죠. 저희들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그 만큼 잊혀져있던 분인데, 경남 마산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1907년생인데요. 한반도가 일제의 입속으로 막 들어가는 그런 시기에 태어나신 분이죠. 그분의 생가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09번지입니다. 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무대 뒤편과 이분의 생가가 맞물려있습니다.
김명시 장군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5남매 중 셋째였습니다.
어머니가 생선행상을 하셨다고 하거든요. 김명시 장군이 마산공립보통학교에 17살 때 졸업을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잠깐 다녔어요.
이 분이 마산을 열아홉살 때 떠나셨는데, 그 이후로 넓은 중국땅 여기저기 만주벌판까지 다니시면서 26년동안이나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무장독립투쟁'을 하신 분입니다. 총을 들고 일본군과 전쟁을 했던 분이십니다. 그런 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그런데,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생선 행상을 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에서, 그것도 당시 여성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어떻게 19살 나이에 중국땅까지 가서 무장독립투쟁을 하셨을까? 여러가지로 좀 갸우뚱 해지기도 합니다.
◆김영만> 그렇죠.. 오빠가 한 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학적부를 보니까 보호자란에 3살 터울인 오빠가 보호자로 되어 있더라구요. 오빠가 거의 가장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오빠는 그 당시에 굉장히 유행을 했던 '사회주의 운동'을 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중에서도 노동운동인 '적색노조'운동을 했고, 마산지역에서 지도자로써 적색노조 지도자로써 굉장히 유명했던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밑에 남동생이 두 살 터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분 역시 부산, 진해에서 노동운동을 활발히 했던 유명했던 분입니다.
오빠가 노동운동을 열심히하고 능력을 평가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동생인 김명시를 당시 사회주의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이었을텐데 '모스코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김효영> 사회주의를 배우러 간거군요.
◆김영만> 그렇습니다. 전문적인 공산주의를 배우러 간거죠.
그때 그 대학이 모든 것이 무료고 학비는 말할 것 없고 잡비까지 줬을 정도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3년제였는데, 1년반 만에 하얼빈으로 일종의 파견을 갑니다.
졸업을 안하고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아서 하얼빈에서 공산주의 탄압이 굉장히 심할 때, 거리에 공산주의자들의 시체가 널부러져있다고 할 정도로 그런 험악한 곳으로 특별한 임무를 받고 파견을 갔습니다.
그 때부터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해서, 1929년과 1930년에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들이 일제에 저항을 많이했을 때, 하얼빈 경찰서 습격을 하는 등 앞장서서 했던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국내로 공산주의 재건운동을 하기 위해서 아마 국내로 파견을 했던 모양입니다. 국내 들어왔다가 내부에 변절자가 있어 가지고, 신의주 역에서 체포되어서 꼬박 7년동안 옥살이를 했던 경력이 있고요. 옥살이를 마치자마자 바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겁니다.
◇김효영>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김영만> 1939년정도입니다. 신의주 감옥에서 나와서 만주를 거쳐서 밤낮으로 산길을 걸어서 중국 관내까지 들어갔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위험하고요. 곳곳에 왜병이 있고 왜경이 있고 마적대들이있고 첩자들이 있고 밀고자들이 있던 그런 속에 중국관내로 들어갔으니까, 보통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이 많이 변절하던 시점이었습니다.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많이 잃었던 거죠.
그 시점에 중국 관내로 들어가서, 중국의 화북지역에서 해방될 때 까지 일본군하고 마주보고 전쟁을 했던 분입니다. 조선 의용군으로 들어갔습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그런데 '백마를 탄 여장군'이라는 별칭은 어떻게 붙었을까요.
◆김영만> 그건 몇가지 설이 있다고 하던데, 저희들이 판단하건데 이렇게 총을 들고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어떤 존경이나 흠모의 호칭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실제로 말도 타고, 조선의용군 속에 여성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고 하거든요.
◇김효영> 당시 김명시 장군은 유명했군요?
◆김영만> 네. 해방이 되고 귀국을했죠. 귀국을 했을 때만해도 종로거리에서 '김명시 장군 만세'라고 종로거리가 가득하게 만세를 불렀다고 하거든요. 그 당시에는 김명시 장군을 다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7년간 행적을 못찾았어요. 그래서 아마 그 동안에 보훈처에서도 이 서훈심의를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몇 년전부터 각 언론사의 옜날자료들을 검색하기가 쉬워졌고, 학자들이 김명시 장군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해서 흔적을 찾으니까, 부평경찰서에서 1949년 10월달에 자기 치마폭을 찢어서 목을 매서 죽었다라는 기사가 자그마하게 실렸습니다.
◇김효영> 아니 독립운동 영웅이 왜 경찰에 잡혀가서 옥고를 치른건지 기록은 없습니까?
◆김영만> 기록에 없어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죠. 사회주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당시 군정이 사회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김명시 장군은 지하에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셨던 것이 1950년 6.25가 일어나기 8개월전에 경찰서에서 그런 변을 당하셨다니까, 아마 체포되어서 고문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강인하고 의지가 강한 분이 왠만해선 자살을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김효영> 그렇게 짐작이 된다는 말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김명시 장군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김영만> 김명시 장군은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유일하게 '장군'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보훈지청에서 챙기지 못한 것이죠.
◇김효영> 이번에 서훈신청을 하셨으니까,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합니까?
◆김영만> 당연히 서훈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김효영> 혹시 김명시 장군의 후손은 안 계시나요?
◆김영만> 저희가 서훈신청을 할 때 몇가지 필요했던 자료가 가족관계, 호적등본 등인데,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저희들이 뗄수가 없었습니다. '김(금)녕김씨'더라구요.
족보에 등록되 있는 사항을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만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김효영> 이건 이제 국가보훈처에서 해야할 일들입니다.
◆김영만> 맞습니다. 저희들이 못 찾은 부분은 국가 보훈청에서 찾아서 해야 합니다.
◇김효영> 우리가 짧은 시간안에 김명시 장군의 생에 전체를 세밀이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김명시 장군'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잘 조사해서 합당한 처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영만> 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