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만에 모습 드러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유체이탈식' 화법

"연루 판사들, 법과 양심에 반하지 않았다는 말 믿는다"
"연루 판사들 잘못 밝혀진다면 그 역시 내 책임"
강제징용 재판개입 등 본인 혐의에 대해서는 발언 없어

'사법농단' 혐의를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검찰 출석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사진=윤창원 기자)
전직 대법원장 신분으로 헌정사상 첫 검찰 소환 조사를 받는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조사에 앞서 밝힌 기자회견이 법조계 안팎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번 사태를 몰고 온 모든 것이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밝혔지만, 정작 책임을 모두 후배 법관들에게 돌린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양 전 대법원장 입장에 비춰보면 검찰 조사에서도 혐의 대부분을 부인할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은 11일 오전 9시 대법원 청사 정문 앞에서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로 국민 여러분께 이토록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 일로 법관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사기관의 조사까지 받은 데 대해서도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양 전 대법원장의 발언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어진 기자회견 내용을 보면 정작 자신은 이번 논란에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는 모양새다.

후배 법관들의 잘못이 있다면 사법행정의 총수로서 도의적 책임이 있을지언정 자신에게는 법적 책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법관도 각자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법률과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고, 저는 이를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잘못이 나중에라도 밝혀진다면 그 역시 제 책임이므로 제가 안고 가겠다"고 말했다.

일제 강제징용 재판개입 의혹이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 자신을 향한 혐의나 의혹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런 양 전 대법원장 태도에 유체이탈 화법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이 나온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의혹에 연루된 후배 법관이나 행정처 관계자들이 법과 양심에 어긋나는 게 없다고 하고 나는 그 말을 믿는다는 입장을 내놨을 뿐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잘못이 나중에라도 밝혀진다면 그 역시 제 책임이므로 안고 가겠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며 "그분들의 잘못이라는 표현은 끝까지 자신과 후배 법관들의 책임을 구분하면서 이번 사태에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무책임한 모습"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도 "이런 상황이 사법부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루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것이야말로 책임을 통감해야 할 대법원장의 유체이탈식 화법 아니냐"고 꼬집었다.

한편 검찰 소환에 앞서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한 점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 끝에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이 사건이 조명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가 편견과 선입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항의 취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탄압받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검찰 수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점을 보이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앞서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논란을 몰고 온 이른바 '놀이터 기자회견'에서 재판 개입이나 판사 인사불이익 등은 결단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는 "사법행정의 총수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며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는 수준의 발언을 내놨다.

7개월이 지난 이날도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