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제목이 '말모이'이길래 이게 뭔가 싶었죠. 그런데 다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러워졌어요. 우리가 쓰는 말들이 그 분들이 지켰던 말들인 거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거든요. 제가 맡은 캐릭터인 류정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해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고 말과 문화, 정책으로 일제가 끝까지 몰아붙일 때 버텨온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무엇보다 어려웠던 점은 류정환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진 감정의 깊이였다. 촬영 내내 풀리지 않는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다. 시나리오만 보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가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작살'이 났다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모든 배우들이 자기를 투영시켜서 감정을 표현해내는 건데 가혹한 현실에서 정환이 가진 책임감과 그 의지가 도저히 현실하고 맞춰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걸 못 잡은 상태고요. 모르고 연기할 때가 제일 힘든데 감정 NG가 정말 많았어요.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느낌이었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깊이를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힘들어서 죽을 뻔했어요. 에너지가 바닥까지 쳤던 거 같아요."
"류정환 대사들이 버겁고 잘못하면 오글거릴 수도 있었어요. 사실 앞뒤를 부드럽게 만들자고 제안했었는데 감독님이 꿋꿋하게 원래대로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좋았던 거 같아요. 배우로서 20 테이크를 간다는 건 정말 대단한 기회를 준 거라서 이번 연기에는 후회가 하나도 없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과연 이런 감독님이 제 배우 인생에 많을까 싶어요. '네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해보라'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받으면 행복하잖아요."
까막눈에서 점점 조선어학회 일원이 돼가는 김판수 역의 배우 유해진과 호흡은 어땠을까. 윤계상은 현장에서 겪은 유해진의 노련함과 성실함 그리고 재능에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시나리오에 없는 애드리브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우리가 붙는 장면들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통을 많이 했어요. 물론 사전에 대화를 충분히 나누고 현장에서 살리는 거지만 실시간으로 치는 애드리브도 너무 잘 맞았고요. 저는 연기 연습을 많이 하고 숙성이 되면 거기에 의외성을 넣어 비트는 방식을 사용해요. 형은 그 정도면 확고한 위치가 있는 배우인데 자기 연기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모든 테이크를 다양하게 시도하는 점이 놀라웠어요. 심지어 그 모든 연기가 다 좋아요."
'우리말'에 대한 영화이다 보니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외래어나 신조어 등이 윤계상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다.
"현장에서 쓰이는 외래어가 진짜 많거든요.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쓰는 말들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세대가 바뀌어서 이제 줄임말을 많이 쓰는데 다시 한 번 우리말의 소중함을 알아야 되는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 계속 그렇게 줄이다가는 뜻이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민들레'에 '민들레'라는 뜻이 없어지면 마음이 아플 것 같은 거죠."
[② '말모이' 윤계상 "'범죄도시' 인기? 마치 god 같은 것"]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