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치 않은 여성 액션물… 이시영 "부담감 컸고 외로웠다"

[노컷 인터뷰] '언니' 인애 역 이시영 ②

2019년 1월 1일 개봉하는 영화 '언니'에서 인애 역을 맡은 배우 이시영 (사진=제이앤씨미디어 그룹 제공)
※ 이 기사에는 영화 '언니'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성 배우들에게 충무로는 여전히 벽이 높다. 수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나 유명 감독의 작품 대다수가 남성 위주로 흘러가고, 주인공이 여럿이어도 여성은 홍일점에 그친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영화는 물론 더 드물다.

남성 배우들이 특별히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모습과 서사로 관객을 만났다면, 여성 배우들은 훨씬 많은 제약 아래서 한정된 모습만을 보여준 셈이다. 주체적이고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를 찾기도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 영화가 간신히 탄생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다. 흥행 여부는 아주 오래도록 남고, 반응이 저조하면 여성 영화는 금세 자취를 감춘다. 숱한 '남성 영화'가 망해도 그게 다음번 '남성 영화'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안 되는 것과 딴판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와 서사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원인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만다.

내년 1월 1일 개봉하는 영화 '언니'(감독 임경택)는 사라진 가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애(이시영 분)의 이야기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차별점은 여성인 인애가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잘못을 저지른 악당을 처절하게 응징한다는 점이다. 여성이 주인공이면서 장르가 액션인 영화는 워낙 희귀하다 보니, 뚜껑을 열기 전부터 자연히 주목을 받았다.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언니'의 주인공 이시영을 만났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액션 영화를 이끄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이번 작품에서 부담감과 외로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또, 언론 시사회 때도 지적된 밀착되는 의상과 하이힐에 관한 생각도 솔직히 전했다.

◇ 붉은 원피스-하이힐 설정, 이시영의 생각은

'언니' 포스터에서 이시영은 밀착되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붉은 하이힐을 신었다. 헝클어진 머리 뒤 얼굴에는 상처가 나 있고 망치를 끌고 있다. 이시영이 맡은 인애는 영화 초반부터 '붉은 원피스-하이힐' 상태로 고난도 액션 장면을 소화한다. 그래서 언론 시사회에서는 여성성을 강조해 몸을 쓰기엔 불편한 차림인데도, 왜 이 의상을 고집했냐는 질문이 나왔다.

시나리오에서 붉은 원피스와 하이힐 차림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 무척 강렬하게 느껴졌고 궁금했다는 이시영이지만, 의상에 관해 임경택 감독과 많은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나눴다. 왜 꼭 그 차림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관해 본인도 일차적 고민이 있었다.

이시영은 '언니'에서 붉은 원피스와 하이힐 차림으로 어려운 액션을 소화한다. (사진=TCO㈜더콘텐츠온,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액션 감독도 처음에는 그 차림을 반대했다. 대역도 없는 상황에서 이시영이 혼자 액션 연기를 다 해야 하는데, 부피감이 있는 옷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원피스를 입으면) 팔다리가 드러나서 동작을 되게 정확하게 해야 했다. 긴 액션 씬 합을 맞추면서 모든 동작을 정확하게 할 수 없었고 하이힐을 신으면 휘청거리기도 했다. 영화적인 완성도가 너무 떨어질 것 같아서 얘기가 많이 오갔다"면서도 "한 달 넘게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크게 생각해서 결국 선택했다"고 밝혔다.

"어떻게 보면 빨간색이라는 색이 여성성을 제일 부각한 느낌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불편하긴 했어요. 왜 꼭 이렇게까지? 싶어서요.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거나, 여자라고 하면 예쁘고 연약한 모습, 하이힐로 잘 빠진 모습 등을 상상하는데 이런 연약한 존재가 분노했을 때 얼마나 힘 있게 변해갈 수 있는지, 또 (상대가) 얼마나 부서져 가는지에 의미를 뒀었던 것 같아요."

◇ '언니' 원래 엔딩은 지금과 달랐다

'언니'의 인애는 전직 경호원으로 어설프게 덤비는 남자들을 능숙하게 제칠 수 있는 프로다. 그래서 동생 은혜(박세완 분)를 찾으러 다닐 때도 거침이 없었다. 은혜를 강간한 옛 동네 주민들을 응징할 때는 끔찍한 신체 손상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악당을 본격적으로 죽이지는 않는다.

이시영은 "저도 액션을 하면서 분노를 더 잘 표현해서 잘하고 싶었는데 안 될 때 너무 힘들었다.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박영춘(최진호 분)을 그렇게 응징하는 게 아니고 사실 급소를 총으로 쏘는 게 엔딩이었는데 조금씩 변하는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불편하지만 이것 또한 현실이었다. 이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가 2~3년 전인데, 이제 이건(영화 속 내용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더 분노하게 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더라. 저도 진짜 처절하게 응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점은 아쉽다"고 밝혔다.

이시영은 극중에서 주짓수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액션을 펼친다. 또한 긴장감 넘치는 카 체이싱도 등장한다. (사진=TCO㈜더콘텐츠온,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범죄 소재의 영화를 하면서 마음이 복잡할 것 같다고 하자, 이시영은 "부모로서 아기도 있는 입장에서 걱정이 많이 되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세대이기도 한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영화에서 한정우(이준혁 분)의 역할처럼, 분노는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지는 모르는, 선악 경계에서 갈등하는… 저도 현실적으로는 그런 사람이다. 항상 그런 부분을 고민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이 이끄는 액션 주인공이라는 부담감

인터뷰 당시 '언니'의 개봉은 약 열흘 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이 영화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원톱'이기에, 이시영이 지닌 고민의 무게는 무거웠다.

"사실은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영화에서가 최고였던 것 같아요. 되게 그냥… 외롭다고 해야 할까요. 저만의 욕심이 있는데 그게 안 될 때도 있고, 하고 싶지만 못할 때도 있고요. 능력 밖의 속상함이 있는가 하면, 능력은 되지만 영화 안에서 안 되는 것들이 있었어요. ('언니'는) 상업영화니까 결과에 따라 진짜 많은 게 좌지우지되잖아요. 예전엔 부담감이었다면 지금은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영화가 너무나 흔치 않지만, 여자가 이끌어가는 영화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분위기가 아예 안 좋은 건 아니라고 봐요. 한편으로는 다행이고요. 그런 분위기에 맞춰 ('언니'도)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도 너무 안 된 (여성 주인공) 영화들이 있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씨가 마르듯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사실 저도 다른 선배님들 다른 작품을 보면서 응원하게 됐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조금 결과가 있어서 조금 더 많은 기회가 생기면, (여성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더 넓어지는 것이니까 (성공이) 간절해요."

혹여 액션 이미지가 굳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이시영은, 자기가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생겼다는 것을 기뻐하는 여유를 갖추게 됐다. 그는 "지금의 저는 비슷한 역할의 영화가 들어와도 충분히 다르게 액션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오히려 더 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니'라는 영화가 여성 영화로서 얼만큼의 영향력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걸 시작으로 제가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남자 배우들 액션 속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저 나름대로 확실한 부분이 있다면 다양하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이라며 "미미하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많은 시도를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제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면, 많이 기회를 얻고 싶다. (제가 뭘) 고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어서 진짜 많이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라고 전했다.

배우 이시영 (사진=제이앤씨미디어 그룹 제공)
2008년 데뷔한 이시영은 올해 데뷔 10년차를 맞았다. 20대 후반에 연기를 시작했기에 늘 '늦었다'는 생각에 조급해했단다. 하지만 이제는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편히 마음을 먹고 어느 정도는 내려놓는 게 본인을 위해 더 나은 길이라는 걸 안다.

"다 뭔가 늦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악착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 스스로를 다그쳤어요. 지금도 쉽지는 않지만 조금씩 내려놓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만 제 연기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제가 하는 연기를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내려놨을 때 연기가 바뀔 수 있다는 걸 최근에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 연기를 몇십 년 하고 싶다는 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 저는 천천히 시간을 갖고 여유롭게 해야겠다고 느껴요. 저 혼자 끙끙 앓는다고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요. (웃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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