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왜 언론은 슬픔을 헤집고서야 그 아픔을 말하려고 하나

희생자 가족과 유족의 슬픔을 다루는 '패턴' 예외 없이 반복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보도하나?"는 질문에서 답 찾아야

18일 강릉아산병원에서 한 희생자 가족에게 취재진이 질문하고 있다. (사진=전영래 기자)
역시나 또 무분별하고 무리한, 그래서 무례한 언론 취재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꽃다운 아이들이 숨지고 다쳤다. 숨진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크게 다친 아이들도 말이 없다. 아이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학생들의 가족에게 관심이 쏠린다.

누군가 예고 없는 혹은 억울한 죽음과 마주했을 때 어쩌면 언론이 그동안 추구했던 '패턴'일는지 모르겠다.

희생자 가족에게 심경을 묻는 '그 지겨운 패턴'은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이번 강릉 펜션사고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자성하던 언론의 모습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사고가 발생하고 찾은 병원에는 수많은 기자가 벌떼같이 몰려들어 희생자 가족이나 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희생자 가족들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면 그대로 돌진하는 기자들도 간혹 보였다.

강릉아산병원 보호자대기실 앞에는 취재진으로 북적였다. (사진=유선희 기자)
어쩐지 보호자 대기실 바깥에 몰려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결국 홀로 4층 집중치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재난보도준칙에 명시된 "피해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되고, 인터뷰를 하더라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현장에서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의든 타의든 희생자 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고민은 깊어졌고 기사 마감 시간은 다가왔다.

그러던 중 한 희생자 부모를 만났는데 그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너무 힘들다"며 들릴 듯 말듯 읊조리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보도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마침 한 피해 학부모가 1층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심경과 입장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기에 그 내용과 현장 분위기를 담아 보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에서마저 대다수 독자는 "아예 유족이나 피해 학부모들에게 다가가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 언론사는 재학생들에게 무리한 취재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맹비난이 쏟아졌고, 방송통신위원회 고삼석 상임위원이 지나친 접근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사고가 난 강릉 펜션. (사진=유선희 기자)
현장에서 고민을 이어나가며 그나마 스스로 확인한 답이 있다면, 그것은 '다가가기'가 아닌 '지켜보기'다.

무작정 돌진해 "한마디만 해달라", "현재 심정이 어떠냐"는 취재 방식은 슬픔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아픔을 헤집어 놓는 것과 같다. 마치 꽃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꺾어 망쳐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희생자 가족과 지인들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지켜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해달라고 전달하는 것. 입을 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것 정도가 '지켜보기의 취재방식' 아닐까.

물론 각자 취재방식이 있을 것이고, 더군다나 취재기자 간 합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같은 '패턴'을 밟으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취재 중 만난 한 동료 기자는 "유족이나 희생자 가족 인터뷰는 아예 하지 말도록 방송사 간 합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현장에서 기자들끼리 이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재난보도준칙도 중요하고 사건 이후 자성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그 해답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보도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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