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측은 변경된 조건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지만, 노동계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을 정면으로 어기겠다는 속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현대차 "5년 임단협 유예 못하면 비용 절감·공장 성공 장담 못 해"
현대자동차는 지난 5일 광주시 노사민정협의회가 의결한 조건부 수정안에 수용 거부 의사를 밝혔다.
쟁점은 향후 5년 동안 임단협을 유예하느냐 여부로, 이러한 갈등은 이미 올해 여름과 가을에 겪었던 일이다.
애초 지난 6월 현대차가 광주시에 내놓은 1차 제시안에서는 임금·단체협약 협상을 5년간 유예하기로 못박았다. 이후 노동계의 반발로 단협 관련 조항이 삭제되자 현대차가 이를 거부했다.
다시 지난 4일 광주시와 현대차 간의 잠정합의안에는 광주 완성차 공장이 차량 35만 대를 생산할 때까지 단체협약을 유예하도록 바뀌었지만, 연간 7만대인 광주 공장의 생산물량을 감안하면 사실상 1차 제시안이 부활한 셈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노동계의 반발로 다음날 조건부 수정안에 관련 내용이 수정됐고, 곧이어 현대차가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현대차 사측은 이번에 광주형 일자리의 노동 조건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향후 비용 상승 등이 우려돼 신규 공장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정부가 광주형 일자리 사업의 출범에 급급해 오락가락 행정을 보이는 와중에 이를 믿고 대규모 신규 공장을 짓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일단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우리 입장은 전달했기 때문에 광주가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안을 던지지 않으면 당장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광주시가 계속 왔다갔다 하다보니 신의가 많이 어긋났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러한 현대차의 요구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정면으로 부인한 채 대놓고 노동착취에 나서겠다는 요구나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문제의 조항을 살펴보면 '신설법인 상생협의회 결정사항의 유효기간은 누적 생산 목표대수 35만대 달성까지로 한다'고 적혀있다.
명확히 노조 설립과 임단협을 거부하는 조항은 아니지만, 노동계는 사실상 노조의 역할을 상생협의회가 향후 5년 동안 대신하도록 못박아 노조할 권리를 가로막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민주노총은 "단지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른바 '상생협의회'란 이름으로 노조 할 권리를 봉쇄하고 무노조 경영을 천명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상생협의회는 무노조 경영을 방침으로 해온 삼성의 노사협의회, 포스코의 노경협의회의 다른 이름"이라며 "광주형 일자리 합의가 노동3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대국민 사기합의"라고 비판했다.
노동계가 법적 대응을 예고한 가운데 만약 노동기본권 제한 조항으로 해석될 경우 국제적 무역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는 무역에 영향을 주는 노동기본권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규정했고, 유럽연합(EU)도 한국 정부에 노동기본권을 지키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 속에 전세계가 무역장벽을 높이는 가운데 자칫 광주형 일자리가 노동자의 임금을 낮춰 자동차를 덤핑(dumping) 판매한다는 분쟁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근본적으로는 광주형 일자리가 지속가능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이미 한국 경차 내수시장은 포화상태인 가운데, 전기차·수소차나 자율주행차량이 아닌 휘발유용 경형SUV 생산라인을 새로 구축해서는 당연히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단 논리다.
민주노총 광주본부 박현완 사무처장은 "내년에는 현대차 울산3공단에서 경유차 10만대를 생산할 예정"이라며 "광주에서 10만대가 추가로 생산되면 경차를 생산하는 각 지역별 공장 간의 치킨게임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유차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현대차 사측은 광주형 일자리에 고용된 노동자들을 낮은 임금에 고용해 이득을 볼 뿐 아니라, 물량 조정 등을 통해 다른 지역의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거나 인원조정 등 압력을 가해 전체 인건비를 낮추는 수법으로 노동자에게 부담을 전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만약 노동계가 이에 반발해 기존 노동조건을 유지하거나, 광주형 일자리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려 해도 문제가 남는다.
문재인 정부에게 광주형 일자리는 단순한 고용 대책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광주를 "자동차 생산기지", "자동차 밸리"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면서 광주형 일자리는 여당의 호남에 대한 '정치적 선물'로 자리잡았다.
더구나 만약 천신만고 끝에 광주형 일자리가 본궤도에 오르면 1천여명의 노동자가 직접 고용된다. 여기에 부품업체까지 감안하면 만여명 이상의 일자리가 광주형 일자리 성패 여부에 결정된다.
자칫 현대차가 경유차 생산라인 투자를 실패로 판단하고 공장 철수를 거론하기 시작한다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현대차 노조가 국민적 비난을 받는 것은 물론, 광주시와 정부도 이를 막기 위해 추가 지원을 검토하도록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박 사무처장은 "현대차는 사내유보금만 136조원이나 갖고 있지만, 광주형 일자리에는 530억원만 투자했다"며 "실제 광주 공장에는 1조원 이상이 투입되야 하는데, 사실상 대부분 정부·지자체 재정으로 틀어막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대로 성공 가능성이 낮은 광주형 일자리가 강행되면 피해는 기존 노동자들과 지역민들에만 집중된다"며 "건전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사측이 적어도 10% 이상을 투자해 책임을 갖도록 하고, 정부는 인프라 투자 등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