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DDP에 온 키스 해링, 초반부터 뜨거운 열기

카즈오 나카무라가 수십년간 수집한 175점 전시
키스 해링의 초반 지하철 작업부터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총망라

컬렉터 카즈오 나카무라가 키스 해링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조은정 기자)
카즈오 나카무라는 1987년 12월 28일 뉴욕 출장에서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작품을 보고 첫 눈에 반했다. 만화 같은 캐릭터들이 아슬아슬하게 무등을 타고 있는 작품을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출장 기간 내내 그 작품 때문에 갤러리를 매일 드나들었고, 결국 뭔가에 홀린 듯이 신용카드 할부로 작품을 구매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카무라의 키스 해링 사랑은 시작됐다. 과학자 출신인 그는 마흔에 사업에 성공해 금전적 여유가 생기면서 해링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만화같아 보이는 작품을 무모하게 수집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들었지만 그의 선택은 결국 옳았다. 그는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키스 해링의 최대 수집가가 됐고, 일본 고부자치아에 '키스 해링 미술관'을 세우기도 했다.

나카무라가 소장한 해링의 작품이 서울 동대문에 왔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에서 지난 24일부터 개최된 전시회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가 초반부터 관람객들이 쏠리면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전시는 나카무라의 소장품 175점으로 작품 수로 대규모로 꼽힌다. 해링이 지하철에서 했던 즉흥 드로잉부터, 조각 작품은 물론 그가 죽기 한달 전에 발표한 <블루 프린팅> 등이 총 망라돼 있다.

키스 해링은 80년대 뉴욕을 대표했던 시대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펜실베니아 시골 출신인 그는 스무살에 뉴욕에서 예술학교를 다니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에게 뉴욕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도시였다. 스무살 패기 넘치는 미대생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뉴욕 지하철 역사에서 몰래 그림을 그렸다. 역무원이 오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리고 도망쳤고, 어떤 때는 현장에서 경찰에 잡혀 연행되기도 했다. 간결한 형태지만 독창적인 이미지들은 금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링은 금새 유명새를 타면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일약 스타가 됐다. 클러버였던 그는 클럽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작품을 만들고, 유명 아티스트들의 앨범 자켓을 도맡는 등 뉴욕의 진정한 힙스터였다.

에너지 넘쳤던 이 청년은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새로운 도전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의 주제도 심오해졌다. 회화 뿐 아니라 조각에도 심취하고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 인간의 내적 불안감, 정치적인 이슈 등을 다뤘다.

지하철 드로잉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꿈꿨던 키스 해링은 유명해진 이후에도 '팝숍'을 열어 자신의 상품을 티셔츠 한장, 열쇠고리 하나로 작품을 공유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1990년 31살 나이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지만 죽기 한달 전까지도 <블루프린트 드로잉>이라는 작업을 진행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딱 10년간 불꽃처럼 예술혼을 태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젊고 열정 넘치는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키스 해링이 처음 대중들을 만났던 지하철 작업부터 초창기 드로잉들, 형광색 컬러 프린터를 이용한 클럽 인테리어 장식, 각종 이슈의 관심을 가졌던 해링의 포스터 작업은 물론 에이즈 진단을 받은 뒤에 작업한 '종말'까지 그의 생애가 녹아있다.

방대한 작품 뿐 아니라 해링의 조각품, 생전 영상과 사진들도 곳곳에 전시돼 있어 관객들을 사로잡을 만한 꽉 찬 전시이다. 전시는 DDP 배움터 지하 2층 디자인 전시관에서 내년 3월 17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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