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29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직후 담화를 발표하고 "매우 유감"이라면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과거사 현안에 대한 일본 고위 관료들의 비난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노 외무상은 앞선 또다른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폭거'라는 이례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전에 나섰고, "(강경화 장관이) 제대로 된 답변을 갖고 오지 않으면 일본에 와도 곤란하다"는 외교 결례까지 서슴지 않았다.
지난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자민당 회의에서는 "한국이 국가의 몸(형태)를 갖추지 않았다"는 도 넘는 발언까지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화해치유재단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해 우리 사법부의 판단을 맹비난하며 이와 관련한 물밑 논의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는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도 넘은 발언에 대해서만 맞대응할 뿐 줄곧 '로우키' 전략으로 대응해 왔다.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되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와 과거사에 대한 들끓는 국민정서, 두 가지 중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곤란함'이 반영돼 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대신 배상하는 입법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과거사 문제를 국제사회로 갖고 가 '힘의 논리'로 싸워보겠다는 심산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배가 불법임을 규정한 것이 핵심인데, 국제사법재판소에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식민지배 경험이 있는 나라들이 힘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법을 인정받길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면서 "'정의'를 이야기하며 당연히 이길 것으로도 생각하지만, 질 가능성도 있어 신중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이 앞선 한일위안부합의 재검토와 화해치유재단 해산,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하나로 묶어 국제사회를 향해 '국가 대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한국'이라며 여론전을 펼칠 가능성도 크다.
피해자들은 배상 판결에 따라 국내의 일본 기업들 소유 부동산이나 채권을 강제집행하는 선택지도 고려하고 있지만, 실제 강제집행이 시행되면 정부로서는 일본과의 관계에 더 큰 부담이 더해지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국내 정서도 거세다. 일본 고위급 정치인들의 막말 발언이 계속해서 이어지면 정부로서도 '로우키' 전략으로 일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이 끝내 배상을 거부할 경우 우리 정부가 나서서 대리보상하거나 한일 공동재단을 설립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지만 과거사 문제의 상징적 의미를 고려했을 때 피해자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정부로서는 한일관계를 망칠수도, 국민 정서를 외면할 수도 없어 고심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
양기호 교수는 "일본과 한국이 함께 펀드를 조성해 기금을 만들고 한국정부가 상징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식이 생산적인데,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일본 정부가 일본 기업에게 한국을 상대하지 말라고 하고 대화 테이블을 피해 뒤로 빠져버렸다"고 진단했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일본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배상을 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포기하되 대법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가해자로서의 책임감있는 태도를 요구하는 쪽으로 우리 정부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마치 가해자인데도 한국에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역전된 측면이 있는데 우리 정부의 입장을 우선 확실히 밝혀야 다시 역전시킬 수 있다. 국제사회의 판단과 국내여론이 함께 진행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고려하며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