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1잔에 1포인트' 유흥업소 필리핀 주스걸의 무대없는 5년 ② 오디션→룸살롱…필리핀 여성 '유통 기획사' |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불렀다. 심사를 보던 '주몽'이라는 한국 남성에게 여권을 만들어 건넸고, 한국어로 된 계약서에 사인했다.
오디션 영상을 냈고, 대사관 면접 때도 노래했다. 그렇게 '예술인 비자(E-6-2)'를 받아 한국에 도착해 간 곳은 룸살롱이었다. 무대는 없었다.
◇ 필리핀 접대원 유통하는 '기획사'…인권위 "인신매매"
자스민은 지난 5년 동안 미군 기지촌 클럽과 전국의 유흥업소로 실려 다니며 술과 음료를 팔고, 룸 테이블 손님 옆에 앉아야 했다.
업소에서 매달 140만원의 소개비를 떼어간 기획사는 40만원만 줬다. 120만원 월급과 매달 3번의 휴가를 약속했던 한국어 계약서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외국인고용법 시행규칙이 정하고 있는 표준계약서 서식은 국문과 영문을 함께 기재해야 하지만 자스민은 숫자 0이 많다는 말만 믿고 많이 받는 줄 알았다.
1만원짜리 주스를 팔면 1포인트씩, 40만원짜리 룸에 앉아 있으면 1시간씩 계산되는 테이블차지(TC)를 채워 업소에서 40만원을 더 받는 게 수입의 전부였다.
매달 120~350 포인트나 10일마다 25시간의 TC를 채워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기획사라는 곳은 마르고, 작고, 노래도 부를 줄 아는 필리핀 여성을 뽑아 클럽과 유흥업소로 보내는 '유통망'이나 다를 게 없었다.
기획사는 관할 시청과 구청에 영업 신고까지 했다고 한다.
기지촌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인 '두레방'의 김태정 활동가는 "필리핀에서도 큰 도시의 경우에는 한국 기획사라는 곳이 결국 유흥업소로 보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자스민이 사는 곳 같은 작은 마을까지 찾아가 오디션을 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를 '인신매매'로 본다. 인권위는 지난 2014년 "UN에서 발표한 인신매매 지표 35개 중 19개 부분에서 E-6-2 소지 이주민이 인신매매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추정한다"고 밝혔다.
여권을 업주에게 뺏긴 상황에서 노동환경에서 떠날 수 없고 임금을 적게 받거나 외부와 접촉이 제한된 채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스민은 다른 3명의 여성과 한 방에서 살았다. 숙소에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다. 방에 음식은 없었지만 CCTV는 있었다. 아파도 병원에 간 적은 없었다.
인권위 2014년 조사를 보면, 예술인 비자로 체류하고 있는 여성 응답자 중 59.1%는 계약한 대로 임금을 받지 못했다.
또 공연과 상관없는 업무를 강요받기도 했는데, 주스‧음료 판매(48.2%), 랩댄스(20%), 성매매(20.9%) 순이었다.
◇ 예고된 점검…가해자 처벌은 0건
자스민은 1년에 2번 무대에서 노래했다. 정부 합동점검이 나올 때였다. 가짜 공연 스케줄을 짠 것이다.
여성가족부가 20일 공개한 올해 두 차례의 점검 결과를 봐도, 자스민 같은 여성에 대한 단속을 했다는 언급은 없었다. 단속을 사전 예고하는 것도 그 이유로 꼽힌다.
피해사례가 없으니 처벌이나 제재도 없었다. 우리 정부는 '팔레르모 의정서'라고 불리는 UN의 '인신매매 특히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예방·억제·처벌을 위한 의정서'를 채택하면서 2013년 형법에 인신매매죄를 만들었다.
하지만 인권위는 인신매매죄를 규정한 형법 289조에 대해 "인신매매에 대한 자세한 정의 규정이 없이 '사람을 매매한 자'라고만 하고 있어, '매매'라는 행위 유형만을 제시해 놓은 것은 오히려 인신매매 의 범위를 좁힐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자스민은 두레방에 도움을 요청해 '구조' 된 뒤 업주를 성매매 강요와 알선, 근로기준법 위반 등 혐의로 고소했다.
여성 대부분 업소를 나오는 순간 체류 자격을 잃어 G-1이라는 임시비자로 머물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예술인 비자로 입국해 G-1 비자를 받은 외국인은 모두 2명뿐이다.
자스민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지만, 임시비자로는 돈을 벌 수도 학교를 다닐 수도 없다.
가수가 되길 바라는 엄마의 권유에서 합격한 기획사 오디션의 결말은 빈손으로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소송절차가 끝나는대로 상처를 안은 채 한국을 떠나는 것 뿐이다.
※ 이 기사는 한 필리핀 여성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