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장사익 (가수)
(장사익 - ‘찔레꽃’) 가슴이 그냥 저릿해지는 이 목소리.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해내는 분이죠. 소리꾼 장사익 씨의 찔레꽃 지금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놀랍게도 장사익 씨 전직은 카센터 주인입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라이브 앨범 하여가 속의 태평소도 이분 연주예요. 이렇게만 들어도 간단치 않아 보이는 인생인데 4년 만에 낸 이번 새 앨범의 제목이 마침 자화상이네요. 자화상으로 돌아온 소리꾼. 오늘 화제의 인터뷰에서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장사익 선생님, 안녕하세요?
◆ 장사익>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김현정>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그동안?
◆ 장사익> 저야 항상 잘 지내고 있습니다.
◇ 김현정> 벌써 목소리가 건강하세요.
◆ 장사익> 그래요?
◇ 김현정> 그런데 벌써 고희시잖아요.
◆ 장사익> 우리나라 나이로 그렇습니다.
◆ 장사익> 글쎄, 저도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7학년이 돼가지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디에 지금 내가 서 있고 어떻게 가야 될 것인가, 문득 그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자화상이라고 의미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봤습니다.
◇ 김현정> 어떻게 쭉 노래 만들면서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니까 열심히 살았구나, 잘살았구나 싶으시던가요?
◆ 장사익> 그렇지는 않죠. 평생 부끄럽고 부족하고 이래서 우리가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그것도 한 90분 정도 가지 않습니까?
◇ 김현정> 그렇죠.
◆ 장사익> 한 5-6분, 한 10분 남으면 옆에 라인 바깥에서 심판 보시는 분들이 전광판으로 ‘5분 남았어’ 그러고 그때부터 정신 차려서 내가 지고 있구나. 그때부터 전원 공격하죠.
◇ 김현정> 혼신의 힘을 다하죠, 지고 있는 쪽은.
◆ 장사익> 그렇죠. 그래서 뭔가 다시 반전을 해야 되는 그런 시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마무리가 멋있게 되어야만이 마치 해가 지듯이 낙조의 멋진 황혼, 노을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선생님 같은 경우는 마흔이 넘어서 가수로 음악을 시작하셨어요. 그렇죠? 그러면 전반전, 후반전으로 치면 후반전부터 음악을 시작하신.
◆ 장사익> 그렇죠. 만 마흔다섯에 제가 노래를 시작을 했거든요.
◇ 김현정> 세상에. 그래서 저는 전반전에는 뭘 하셨나 봤더니 딸기 장수, 보험 회사 직원, 외판원, 경리과장, 카센터. 무려 열다섯 가지 직업을 하셨다는 게 맞아요?
◆ 장사익> 네, 창피하죠. (웃음)
◇ 김현정> 아니, 그런데 마흔이 넘어서 나는 음악을 해야겠다, 음악이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마흔이 넘어서 하셨어요?
◆ 장사익> 그건 팔자고요. 열댓 가지를 전전하면서 인생의 그런 굽이굽이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저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가 못났으니까 내가 좀 부족하니까 하면서 그때마다 그렇게 좀 반성을 하면서 그냥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제가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이런 노래하는 길을 찾지 않았나 생각을 하죠. 만약에 그때 제가 좌절하고 엉뚱한 짓하고 했었으면 오늘과 같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김현정> 그럴 수 있네요. 그럼 음악 한번 해 볼까 이러면서 마흔 넘어서 국악으로 먼저 음악을 시작하셨어요.
◆ 장사익> 그렇죠. 그때 제가 그동안 꿈을 갖고 있었던 태평소라는 악기. 여기에 제가 목숨을 걸었어요. 이거를 좀 제대로 하면 밥은 일단 해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물놀이라든가 농악판에 기웃기웃하면서 그냥 연명을 했죠. 그러다 보니 거기서 뒤풀이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하던 가락이 있거든요. 옛날에 노래도 배웠고 곧잘 했었고. 그러니까 막 뒤풀이가 완전히 저 때문에 뒤집어졌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한번 나가보자고.
◇ 김현정> 음반을 내보자?
◆ 장사익> 그래서 그때 저는 솔직히 생각이 없었는데 딱 한 번만 놀아보자고 해가지고 이런 기회가 온 것 같아요. 그래서 24, 25년을 이렇게 왔거든요, 제가. 이게 진짜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찾던 길이었구나, 인생은 바로 길을 찾는 그런 작업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 김현정> 그렇네요. 열다섯 가지 이 골목으로도 가보고 저 골목으로도 가보고.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내 길에 내가 서 있더라 이런 말씀. 여러분, 이게 태평소 소소하게 했습니다 이러시지만 사실은 태평소로 한 2년을 우리나라를 아주 들었다 놨다, 국악계를 들었다 놨다 하실 정도의 명인으로 인정받으셨어요. 그러고 나서 노래를 하게 됐는데 어떤 분들은 그러세요. 장사익 씨 하면 이분은 국악인이야? 대중 가수야? 뭘로 설명되는 게 좋으세요?
◆ 장사익> 글쎄, 제가 솔직히 좀 정체성이 없습니다. (웃음) 왜냐하면 기웃기웃했던 인생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솔직히 그렇거든요. 그런데 음악이라든가 예술에는 솔직히 장르가 과연 규정되어야만 꼭 되나 하는 그런 생각도 저는 하거든요. 자유스러워야 되거든요. 조금 뭔가 조금 저도 하면서도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요. 제가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 김현정> 그리하여 그냥 우리는 소리꾼. 이렇게 하겠습니다. (웃음)
◆ 장사익> 감사합니다.
◆ 장사익> 네.
◇ 김현정> 제가 직접 건네들은 건 손숙 선생. 손숙 선생님도...
◆ 장사익> 맞춰놨어요, 벌써.
◇ 김현정> 맞춰놨... 예약하셨어요? (웃음)
◆ 장사익> 예약은 넘버 1번으로 제가 지금 다 맞춰줬죠. 공책에 기입을 해 놨습니다. 그래도 빨리 오면 안 되고. (웃음)
◇ 김현정> 빨리 오면 안 되죠.
◆ 장사익> 제일 나중 거로 했습니다.
◇ 김현정> 아니, 왜 그분들이 우리나라의 내로라 하는 그분들이 장사익 선생의 목소리로 내 가는 길, 세상 가는 길을 좀 배웅해 줬으면 좋겠소. 왜 그러실까요?
◆ 장사익> 글쎄, 노래라는 것이 즐거울 때 손뼉 치면서 그냥 흥겹게 하는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은 세상에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려면 같이 울어줘야 된다고 하는 그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슬플 때 슬픈 그런 모습들을 그런 느낌들을 거기서 풀어냈을 적에는 그 슬픔의 의미가 더 이렇게 와닿고 슬픔을 씻어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저도 어머님 돌아가셨을 적에 뒤늦게 돈을 들여야 맛있는 음식을 드릴 수 없더라고요. 그때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던 노래 한 곡 있었습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고 유행가지만. 그 노래를 엄마, 내가 어머니한테 이것뿐이 드릴 게 없어요. 그 노래를 조용히 불러드렸죠. 하여튼 그리고 ‘봄날은 간다.’ 같은 건 하나의 맺힘입니다.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노래 한 곡조지만 그게 한마디로 다 정의를 할 수가 있거든요. 연분홍 치마가 휘날릴 때.
◆ 장사익> (노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노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여기서는 막 또 꽃이 피면 같이 가고 꽃이 지면 같이 울고. 이런 그런 옛날의 약속들이 봄날이 가버리면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클래식도 좋지만 우리나라의 그런 음악들이 다 거기에 적합하게 맞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참 저는 이런 노래들 부를 때가 더 행복합니다.
◇ 김현정> 음악은, 음악은 우리의 위로다.
◆ 장사익> 그래서 오히려 그런 데 삼가해야 되는 노래들이지만 오히려 그런 상주분들이 행복하다고 해요.
◇ 김현정> 참 위로가 되는 목소리네요. 정말 저릿저릿한 그 목소리 인생의 희노애락이 다 담겨 있는 그 목소리 참 좋은데 장사익 선생님 이제 새 앨범 자화상 내시고 내년에는 2월에 러시아 공연, 6월에 캐나다 공연.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시고. 들으시는 분들 이미 봄날은 간다로 마음 한 번 쿵 내려앉은 그분들게, 고생했다고 토닥토닥 한마디 좀 부탁드릴게요.
◆ 장사익> 금년 여름이 정말 참 힘들었지 않습니까? 100년 만에 한 번 오는 그 무더위인데.
◇ 김현정> 더웠어요.
◆ 장사익> 가을 초에 얼마나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까? 그 선물을 받은 것 같은데 참 즐겁고 신비스러운 날인 것 같습니다. 나이 먹는 것도 똑같고요. 그래서 힘 좀 내시기를.
◇ 김현정> 힘 좀 내시고. 그렇네요. 힘 좀 내시고 인생은 축구 경기. 나는 어디쯤 서 있나.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고맙습니다.
◆ 장사익> 감사합니다.
◇ 김현정> 참 좋네요. 소리꾼 장사익 씨였습니다. (속기=한국스마트속기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