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치유재단이 신뢰받지 못한 이유, 3년의 기록

공식사죄와 법적배상 빠진 2015년 합의
발족식 동원·피해자 면담 왜곡 의혹까지
유령 재단 1년 만에 최근 해산 방침 발표
피해자 절반 별세…책임지는 이 없어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9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안타까웠습니다. 대통령을 믿었던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해산한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배상하는 것뿐입니다"

정부가 화해치유재단 해산 방침을 공식 발표했던 지난 2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2) 할머니가 병상에서 어렵게 꺼낸 말입니다. 이날 김 할머니는 암이 온몸으로 퍼져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퇴원해야 했습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 외교부 고위 당국자를 면전에서 혼쭐낼 정도로 정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쩍 핼쑥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시계를 3년 전으로 돌려 볼까요. 김 할머니는 2015년 12월 28일 양국 정부가 이른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를 발표할 당시부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일본 당국자가 읽었다는 사과 입장과 별안간 튀어나온 10억엔의 '시혜 조치'로는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수요집회에 참여하는 등 지난 25년 동안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했는데, 허탈하셨던 거죠.

"그런 사죄 받으려고 우리가 이때까지 고생하고 있었습니까? 장관님들 자기네들 자식들이 갔다면은 이렇게 속결 타결이 됐을까요? 절대적으로 우리들은 반대입니다. 직접 아베가 나서서 속이 우러나는 사죄를 해야지 마음이 풀리지. 너무나도 분하고 생각할수록 억울합니다" (김복동 할머니)

당시 다른 할머니들도 피 끓는 목소리로 양국의 합의와 재단 설립에 항의했습니다.

"저희들은 돈이 필요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공식 사죄와 또 법적 배상인데. 우리 46명 할머니뿐 아니고 하늘에 계시는 우리 돌아가신 할머니들. 돌아가신 거 아니고 눈만 감았다뿐이지, 역겨워서, 보기가 역겨워서. 얼마를 주고, 그런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용수 할머니, 91세)

"돌아가서 다시 협상하세요. 아베는 골프 치러 가고, 아베 부인은 야스쿠니 신사 가서 참배했답디다. 일본놈들한테 구걸합니까. 우리 돈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유희남 할머니, 당시 87세)

박근혜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내놓은 10억엔을 피해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 화해치유재단을 다음 해 7월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외교부 차관에게 호통치던 유희남 할머니가 평생 바라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폐암으로 별세한 지 2주 만이었습니다.

재단은 출범 전부터 여러 의혹,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첫 사례는 바로 할머니들을 교묘하게 속여 발족식에 동원하려 했다는 논란이었습니다. 정부 관계자가 재단을 반대하던 할머니들에게 "점심이나 드시러 나오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재단 발족식이었고, 할머니들은 배신감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네 사람이나 왔습니다. 와서 저를 꼬시려고 했습니다. 다른 할머니들이 그리고 단체장들이 다 승인을 했으니 할머니도 동참하라고 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


재단이 가장 크게 신뢰를 잃은 부분은 바로 피해자 면담조사 왜곡 의혹이었습니다. 정부와 재단은 이때까지 3차례에 걸쳐 피해자 대부분을 만났고 "상당수가 재단 설립에 긍정적이었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면담 과정에서 재단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는 할머니들이 나오면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여성가족부는 실제 몇 분의 피해자가 긍정적으로 답했는지나 평가문항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단은 출범 당시부터 할머니들을 비롯한 각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공식 출범 기자회견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회견장에 난입한 대학생 20여명이 무대를 점거해 아수라장이 됐고, 회견 이후 김태현 이사장은 30대 남성으로부터 '캡사이신' 세례를 맞아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면담조사 왜곡 의혹은 두달 뒤에 더욱 증폭됐습니다. CBS노컷뉴스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문미옥 의원실을 통해 확인한 정부 문건에는 재단이 국내 거주 피해자 40명 가운데 4명을 제외한 36명의 의견을 청취했다고 돼 있었습니다. 피해자 지원시설 '나눔의 집'과 '정대협 쉼터'에 있던 10여명이 면담을 거부하거나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숫자였습니다. 의심을 품고 김태현 당시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당한 답을 듣게 됐습니다.

"제가 이것저것 말씀드릴 때 그분들은 쳐다보고 웃으시거나 고개를 끄덕거리시는 분도 있고 대답을 안 하시는 분도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다 말씀드리고 손잡아드리고 안아드리고 나왔습니다. 그게 면담이죠. 그분들에게는" (김태현 이사장)

재단은 이후 늦었지만 나름대로 아베 총리에게서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담은 편지를 받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피해자나 유족이 재단을 통해 현금을 수령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생존 피해자 34명, 사망자 유족 58명이 '치유금' 명목의 돈 44억원을 받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물론 치유금은 일본 정부가 배상금이 아닌 인도적 성격으로 낸 10억엔의 거출금이었습니다.

재단은 각계의 십자포화를 맞아야 했습니다. 특히 준비 없이 급하게 만들어진 탓에 법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았고 실무적인 부분에서 '꼼수'를 부린다는 지적을 잇달아 받게 됐습니다. 없는 예산은 10억엔에서 빼서 써야 했고, 사무실은 외상으로 이용했습니다. 여기에 이사진 상당수가 소위 '셀프 인선'으로 자신들에 의해 스스로 추천되고 추인됐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말 조사한 결과, 위안부 합의는 졸속 밀실협상이었던 것으로, 재단 측의 피해자면담 조사왜곡 의혹도 일부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다만 여가부는 관계기관과 협의하겠다며 후속조처를 미뤘습니다. 또 재단 설립이 졸속으로 이뤄진 배경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다고 밝힐 뿐 관련자들에 대한 별다른 조처는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 무렵 당연직 이사를 제외한 이사 전원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화해치유재단은 1년째 개점 휴업 상태를 지속했습니다. 물론 재단법인을 유지하기 위해 등기상에는 이사들의 이름을 꼼수로 남겨놨습니다. 30평짜리 사무실은 지난여름 한쪽을 토막 내 임대공간을 10평 남짓으로 줄이고 어정쩡하게 버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던 김군자, 하점연 할머니는 지난 7월과 10월 차례로 별세했습니다. 우리 정부에 등록된 240명의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27명밖에 남지 않았네요. 2015년 한일 합의 당시 46명이 계셨는데 절반 가까이가 돌아가셨군요. 김복동 할머니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며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1인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이 재단은 최근 여가부가 해산시키겠다고 선언하면서 앞으로 6개월에서 1년 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입니다. 이사가 없으니 주무부처 장관의 직권으로 재단 허가를 취소했던 '미르 재단'의 사례를 참고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할머니들이 겪었던 수모는 누가 보상해 줄까요. 여가부나 재단에서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누구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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