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소녀의 세계'가 이성애 로맨스 영화였다면 그저 그런 영화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규모인 국내 퀴어 영화 시장에서 이런 밝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나왔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성애 이외의 로맨스를 금기시하는 한국 사회 분위기 탓인지 보통 국내 '퀴어' 영화하면 어두운 이미지부터 연상된다. 주인공들은 대개 사회적 장벽에 가로막혀 어둡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을 겪는다. 영화 역시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소녀의 세계'는 그런 퀴어 영화의 지속적인 관점을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을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 다소 전형적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소녀 봉선화는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에 우연히 줄리엣으로 발탁되고 모두가 동경하는 연극부 하남 선배를 만나 두근거리는 첫사랑을 겪는다.
영화는 늘 우주를 공상하는 다소 엉뚱한 소녀 봉선화의 감정에 집중한다. 친구에게 대체 '사랑이 뭐냐'고 묻던 봉선화가 어떻게 사랑의 감정을 깨달아 성장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축이다. 봉선화는 베일에 싸인 '하남 선배'의 아픔을 지켜보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어딘가 남다르게 멋진 하남 선배의 사랑은 봉선화의 첫사랑과는 또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동성애를 향한 사회적 편견 등은 하남 선배와 수연의 관계를 통해 암시적으로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퀴어' 영화라고 해서 꼭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현실을 비판해야 하는 법은 없다. '소녀의 세계'는 나름대로 청춘 로맨스라는 장르 안에서 여성 '퀴어' 영화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소녀의 세계'가 해낸 도전은 충분히 용기 넘친다.
'소녀의 세계'는 헬로비너스 출신 나라의 첫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단발에 어딘가 차가운 모습의 하남 선배는 나라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아역배우 노정의가 봉선화 역을 맡아 나라와 호흡을 맞춘다. 관계 형성 과정이 이미지로 표현되는 영화이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사들은 가끔씩 너무 판타지스러워 오글거림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수연 역의 조수향이 안정적인 연기로 두 캐릭터가 만드는 현실과의 간극을 해소한다.
청춘의 달달한 로맨스 영화가 고픈 이들에게 '소녀의 세계'를 권한다. 오는 29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