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는 강제징용 피해자들 소송의 상대방을 재단으로 한정해 일본 기업 대신 배상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최근 드러났다. 검찰은 징용소송 재판의 결론을 최대한 늦춘 다음 재단의 배상과 연결시켜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정부 방안을 당시 사법부가 정교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11일 법원과 검찰·외교부 등에 따르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13년 12월 1일 당시 차한성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황교안 법무부 장관 등을 소집한 이른바 '공관회동'에서 이같은 논의가 오갔다. 징용 피해자들이 낸 소송의 재상고심이 같은해 8월 대법원에 접수돼 배상 판결 확정을 앞둔 때였다.
차 전 대법관은 "국외송달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길 수 있다"며 구체적인 재판지연 방안을 제시했다. 참석자들은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로부터 3년이 지난 2015년 5월 이후에는 다른 피해자들의 추가 소송 제기가 불가능하다는 법원행정처의 소멸시효 검토 결과를 공유했다.
회동에서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준비위원회의 구성 현황 등 추진 경과도 보고됐다. 한일 정부와 기업이 출연하는 이른바 '2+2 재단' 형태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재단으로 소송을 일원화하고 배상금 지급을 맡겨 일본 기업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구체적 로드맵은 회동 이후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으로 작성됐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당시 "징용소송이 독도, 위안부 문제만큼 중요하다"는 견해를 주변에 피력했다고 한다. 일본 기업에 배상책임을 물릴 경우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간으로 삼는 한일관계가 악화할 것을 우려한 외교부가 재단을 이용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이같은 해결책은 회동에 앞서 2013년 11월 김 전 실장과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이미 검토됐다.
참석자들은 "일본이 재단 설립을 반대하지만 판결을 늦춘다면 일본 측이 우리의 노력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관건은 대법원을 설득해 최종 판결을 늦추는 것"이라며 재판개입을 기정사실화했다. 박 전 대통령은 회의 결과를 보고받고 외교부에 후속 작업을 맡기는 방안을 승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재단을 징용소송으로 인한 갈등의 최종 해결책으로 여긴 것으로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재단의 설립·운영은 물론 포스코가 100억원을 출연하기로 결정한 과정까지 면밀히 들여다볼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행정자치부가 재단 운영에 관여하다가 소송까지 제기된 배경에 청와대 등 외부 입김이 작용했는지도 확인할 계획이다.
행자부는 재단 설립이 추진되던 2013년 말 설립준비위원회에 "장관이 이사장과 이사, 감사를 임명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준비위원회는 표결 끝에 임명제를 받아들여 이듬해 6월 재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임명제에 반발하는 일부 유족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행자부의 이사장 등 임명 처분이 무효라고 판단했지만 2심 재판부는 행자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지난 7일 차 전 대법관을 소환해 공관회동에서 재단 관련 논의가 오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2014년 10월 이른바 '2차 공관회동'에서도 재단을 통한 문제 해결이 현안으로 다뤄졌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2차 회동에는 당시 박병대 법원행정처장과 정종섭 행자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검찰은 이르면 이번 주 박 전 대법관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