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독이 됐다

'좀비물 전문가' 정명섭 작가, 영화 '창궐' 부진 진단
기대 무너뜨린 알맹이…"'뭘 좋아할지 몰라' 딜레마"
"사극+좀비 소재·비주얼·액션 등 나쁘지 않았으나…"

영화 '창궐' 포스터(사진=NEW 제공)
사극에 좀비물을 결합시킨 색다른 소재로 기대감을 한껏 높였던 블록버스터 '창궐'(연출 김성훈)이 막상 뚜껑을 연 뒤에 기대를 크게 밑도는 성적으로 고전하고 있다. 이에 '좀비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작가 정명섭에게 진단을 청했다.

7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25일 개봉한 '창궐'은 전날 1만 4008명의 관객을 보태며 누적관객수 155만 3078명을 기록했다. 제작비 170억원을 들인 이 영화는 해외 세일즈 호조 덕에 국내 손익분기점을 380만여명으로까지 낮췄으나, 지금 추이로는 이마저도 달성이 어려워 보인다.

기대감이 컸던 만큼 초반 흥행세는 나쁘지 않았다. 비수기로 꼽히는 가을 극장가임에도 '창궐'은 개봉 첫날 15만 6644명을 동원해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다. 개봉 4일 만에 누적관객수 100만명을 넘기면서 기세를 올리는 듯했다.

그런데 흥행 탄력이 붙지 않았다. 대신 "재밌다"고 입소문이 난 '완벽한 타인' 등에 관객들이 몰렸다. '창궐'에는 여전히 많은 스크린과 상영횟수가 주어지고 있으나, 그에 걸맞은 성적을 못 내는 현실이다.

최근 영화 '창궐'을 봤다는 작가 정명섭은 6일 "창작자로서, 좀비를 좋아하고 관련 영화를 많이 본 입장에서 '창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달며 긍정적인 면을 먼저 언급했다.

"우리나라 영화 속 좀비 비주얼은 '부산행'에서 갑자기 높은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적어도 블록버스터급 영화에서만이라도 그 수준이 유지되기를 바랐는데, '창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숙달된 좀비 연기자들의 움직임은 대단히 자연스러웠다. 엔딩 크레디트에 해당 연기자들 맨얼굴 사진이 나오는데, 그 자부심이 납득되더라."

이어 "액션 장면도 궁금했는데, 특히 중후반부 지하감옥 탈출 신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며 "'부산행'이 나온 직후부터 '역사와 좀비물을 결합한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좀비 분장에 한복을 입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이 부분은 잘 구현했다"고 덧붙였다.

◇ 후진 서사…"300만~500만 관객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의 결과물"

영화 '창궐' 스틸컷(사진=NEW 제공)
다만 정명섭은 이 영화가 관객의 공감을 살 만큼 서사와 메시지를 세련되게 다듬지 못한 점을 결정적인 '마이너스' 요인으로 꼽았다.

"영화도, 책도 뭔가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살짝 가린 다음에 보여주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창궐'에서는 이를 친절하게, 너무 선명하게 보여주려 하는 바람에 오히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역설을 낳았다. 아쉽지만 선택과 편집의 문제다."


그는 "'창궐'에 대한 관객 평이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아는데, 개인적으로는 좀비물로 쳤을 때 높이 평가하고 싶다"면서도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100억원 넘게 들인 블록버스터인지라 수익을 극대화 해야 한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고 진단했다.

"나처럼 책을 쓰는 사람은 독자 1만명 정도만 만족시키면 되는데,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적어도 300만~500만 관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요즘 유행어처럼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가 되는 셈이다. 잘생긴 주인공에 아이돌 멤버 한 명은 꼭 포함시키고 감초 역할을 넣어야 한다. 여기에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는 무조건 녹인다는 식의 조건을 따라가는 과정인 셈이다."

정명섭은 "극중 내내 깐족대던 냉소주의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지붕 위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식으로, 관객들이 감정 이입할 여지도 없이 정치적 함의를 너무 많이, 친절하게 대놓고 담아낸 탓이 커 보인다"며 "그간 이어온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이러한 흐름이 최근 들어 관객들 눈에 거슬리고 피로감을 누적시키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창궐'은 마지막에 가면 '주인공 보정'(창작물에서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동료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혜택)이 이뤄진다. 초반 제물포 초가집 신에서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야귀' 들이 마지막에 가면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일격을 가하지 못한다는 점은 관객들의 납득을 어렵게 만든다. 주인공이 감염을 피할 수 있는 장치나, 주인공과 최강 적의 지붕 위 1대 1 전투 등으로 긴장감을 더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 "관객들은 새로운 것 원하는 지점에…곧 해답 찾아낼 테지만"

영화 '창궐' 스틸컷(사진=NEW 제공)
"타협하게 되면 결과가 애매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게 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계를 '창궐'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것 같다"고 정명섭은 꼬집었다.

"한 달에 영화 한 편 정도를 관람하는 보통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 최근 들어 한국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 지난해부터 올해 나온 관련 작품을 보면 좋은 소재로 눈길을 끌어도 내용이 비슷비슷하거나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할 정도의 플롯만을 따라가고 있다."

특히 "그것이 안전한 방식이고 블록버스터가 지닌 한계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관객들은 그 밖의 새로운 것을 원하는 지점에 와 있다"고 강조했다.

정명섭은 "그 해법을 아직 영화계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 같은데, 그들은 항상 해답을 찾아내 왔다는 점에서 크게 걱정은 안 한다"며 말을 이었다.

"지금 한국 영화계는 엄청난 인재와 자본이 모여드는 곳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찾을 것으로 본다. 개인적으로는 '신선함'에 그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창궐'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좀비물이라는 소재와 비주얼, 액션신, 캐릭터 자체는 나쁘지 않다. 여기에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요소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플롯을 짜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지나치게 느슨해진 부분이 없는지 점검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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