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제 사건에도 침묵…영화계 책임 못 느끼나"

영화계 단체들 내부 성폭력 인식·대응 변화 촉구
영화노조 "현장 위험요소 계약서 명시 안돼…배우는 인형 아냐"
한독협 "묵인해 온 폭력…영화계 모두 책임감 느끼고 변화해야"
찍는페미 "영화계에 병폐 산재…개인 아닌 우리 사회·집단 문제"

6일 오전 서울 동교동 청년문화공간 주에서 남배우A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더 나은 영화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 촬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 (사진=황진환 기자)
조덕제 성폭력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영화계는 어떤 해답을 찾아 나서야 할까.

남배우A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로 모인 영화계 단체들이 '현장'과 '관례'라는 명목 아래 이뤄지는 촬영 과정 속 성폭력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위해 영화계 전체에서 문제 인식 공유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을 함께했다.

전국영화산업협동조합(영화노조)·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찍는페미 3개 단체는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에서 공대위가 주최한 '더 나은 영화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촬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영화노조는 공대위 활동에 참여하며 여성 영화인들, 그 중에서도 여성 배우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몸소 알게 됐다.

영화노조 안병호 위원장은 "합의와 동의 없는 현장 진행은 계획되고 적법한 현장을 지향했던 우리에게 용인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공대위에 선뜻 참여하게 됐다. 초기 영화계에는 여성 문제에 대응하는 구조를 갖추거나 연대의 목소리가 구성되지 못했다. 활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여성 배우의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됐다"라고 공대위 참여의 계기와 당시 영화계 상황을 전했다.

안 위원장이 밝힌 촬영 현장의 현실은 이러했다. '베드신'이나 사건 영화의 '강간신'에서 여성 배우들은 피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며 남성 배우의 손과 감독들의 입에 의해 연기가 결정된다. 계약서를 쓴다 해도 노출의 유무만 명시될 뿐, 촬영에 임박해야 노출 수위와 현장 통제를 정하는 수준이다.

그는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영화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장에서의 위험 요소가 계약서에 명시되면 사전에 얼마든지 정비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나 제작사 측에서는 계약서를 어떻게 구체화 해서 예방할 것인지 전혀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실제 노출 연기를 전제한 배우들의 계약서를 봐도 어떤 수위로 어떤 장면을 촬영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감독들이 무엇이든 시킬 수 있다는 인식 아래 이런 계약서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다루는 연기라면 배우를 인형이나 대상물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이런 피해자들이 양산되도록 놔둘 것인가."

대법원에서 조덕제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됐지만 여전히 영화계에는 그를 두둔하는 의견들이 팽배하다. '예산 부족이나 제작사의 사정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과 '감독 지시에 따른 배우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주장들이 주축이다. '설사 문제점을 인식한다고 해도 하루 아침에 관행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안 위원장은 "배우의 잘못은 감독의 잘못이 있음에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연기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현장은 비상식적"이라며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해 왔던 우리의 현장을 바꿔야 한다. 이제는 그냥 넘기지 말아야 한다"라고 변화를 촉구했다.

찍는페미와 한독협은 영화계가 이 사안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해야 그 동안 쌓인 병폐를 청산하고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찍는페미 관계자는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와 그들의 입을 막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일을 하는 현장에서도, 문제 제기를 하는 현실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안전'할 수 있는 지를 고민해야 했다"면서 "우리는 영화의 완성을 위한 부속이 아닌 사람이다. 사람 답게 일하기 위해서는 성폭력 없는 안전한 영화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영화계에 산재한 병폐를 개인의 문제로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집단의 문제로 여기며 행동하고 변화 시켜야 한다"라고 영화계가 지향해야 하는 일터의 모습을 분명히 했다.

한독협 관계자 역시 "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라 영화계가 오랫동안 '특수성'이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묵인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이 구조를 보지 않고 '왜 감독 지시에 따른 배우만 추궁하느냐'는 것은 결국 폭력의 고리를 끊을 의지가 없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일침했다.

이어 "우리는 이 판결을 계기로 변해야 한다. 더 이상 '예술'이나 '진정성'이라는 변명으로 폭력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 영화계에 있는 모두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며 "특히 감독과 PD, 제작자를 비롯한 책임자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담론과 대안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영화계의 책임있는 행동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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