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海餘波作一區(대해여파작일구) 큰 바다의 여파로 한 구역을 만들고
此間蕆得小方壺(차간장득소방호) 그 사이에 작은 방장산(方丈山)을 두었네.
四仙迹留千年地(사선적류천년지) 네 신선의 자취는 천년의 땅을 간직하고
삼일명전십리호(삼일명전십리호) 삼일의 이름은 십리호에 전해지네
이 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유경시(柳敬時)의 시문집. 함벽당문집(涵碧堂文集) 2권에 들어있는 시로 금강산을 돌아보고 쓴「유금강산록(游金剛山錄)」에 들어 있다.
금강산 삼일포 호수 안에 있는 사선정(四仙亭)은 고려 충숙왕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된 박숙정(朴淑貞)이 세웠다고 전한다. 신라시대 사선(四仙)인 영랑(永郎)·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인 것이다. 영랑과 술랑, 남랑, 언상은 신라시대 화랑들 이름이기도 하다.
북한이 세운 단풍관에서 바라보이는 사선정은 남측 관광객에게는 화중지병이었다. 눈 앞에 보이지만 가볼 수는 없는 곳, 그런데 남북 민화협이 4.27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연대모임에서 사선정을 볼 기회가 생겼다.
노를 젓는 나룻배와 동력이 달린 소형선박이 20여대 대기 중이었다. 북측 요원들에게 배를 탈 수 있냐? 고 물었더니 나룻배는 5달러(북에서는 다섯달라로 부름) 동력선은 10달러(열달라 라고 함)라고 했다.
동력선에는 북측 선원 2명이 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면서 단풍관 앞을 지나고 와우도를 지나 사선정으로 곧장 달렸다. 사선정은 큰 정자는 아니었지만 물위에서 바라보니
바위 위에 우뚝 솟은 성채 같았다.
지금의 사선정은 1960년대 북에서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사선정을 돌아오니 다른 관광객들에게는 배를 타지 못하게 했다. 안전사고의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260여명의 남측 방문객 중 2명만 사선정을 근접해서 보는 호사를 누린 것이다.
삼일포는 남강 하류(강원도 고성군 온정리(溫井里)에서 동남쪽으로 1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자연 호수로서 석호에 해당된다. 즉, 삼일포는 원래 동해의 만(灣)이었으나 남강(적벽강)으로부터 밀려온 흙과 모래에 의해 만의 입구가 막히면서 호수가 되었다. 남강 둑을 만들면서 일부 구역은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