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지가 맡은 끝녀를 거칠게 표현하면,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 친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일의 낭군님'을 봤다면 그런 요약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끝녀는 홍심(남지현 분)의 친구로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이 있었다.
퓨전 사극이라는 장르의 특성 덕에 유연함이 있다고는 해도 '백일의 낭군님'의 배경은 조선 시대였다. 부녀자의 도리가 어떻고 하는 시대에,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생긴 것(극중 원득의 외모)을 잘생겼다고 말하는 용기를 지닌 캐릭터가 끝녀였던 것이다.
'백일의 낭군님'이 끝난 다음 날인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이민지를 만났다. 2달 가까이 수수한 한복 차림만 보다 재킷과 블라우스, 스커트를 매치한 모습이 괜히 생소하게 느껴졌다.
◇ 이민지의 첫 사극 '백일의 낭군님'
이민지는 2009년 영화 '이십일세기 십구세'로 데뷔한 후 주로 단편·독립영화에 출연해 왔다. 드라마 출연작은 '선암여고 탐정단', '응답하라 1988', '게임회사 여직원들', '로봇이 아니야' 정도다. '백일의 낭군님'은 이민지가 만난 첫 사극이었다.
하지만 처음 제안받았을 때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현대극과 달리 사극에서만 요구되는 부분이 있기에 두려움이 앞섰고,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아 한 번 거절했다고.
"조연이다 보니까 시청률 신경 쓰는 것에서 저는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감독님, 작가님 등 같이 하는 사람들이 좋은 분이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이종재) 감독님이 워낙 좋은 분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고 재미있으니까 같이 해 보면 좋을 것 같았는데 그게 너무 잘한 선택이었던 거죠."
물론 본인이 맡은 끝녀도 마음에 들었다. 이민지는 "주인공의 친구라는 약간 정형화된 캐릭터일 수도 있는데 그런 느낌보다는 되게 돌직구를 많이 날려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억지 혼인이어도 남편 있는 상황에서 자기 친구 남편에게 '되게 멋있다', '그림 같다', '만져보고 싶다' 하면서 감정 표현에 솔직한 게 너무 재미있었다"고 전했다.
끝녀는 자기 뜻과 무관하게 구돌(김기두 분)과 결혼해 졸지에 유부녀가 된다. 마지막 회에서는 임신도 했다. 결말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이민지는 "임신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그는 "끝녀라는 역할이 끝까지 나올 거라고 예상을 못 했다. (극의 중심이) 한양으로 넘어가게 되면 송주현 마을 분량이 자연스럽게 줄겠거니 했는데, (끝녀는) 한양을 따라가 버리더라. 작가님이 송주현 사람들을 좋게 봐 주신 것 같아서 너무 감사했다. 너무 예상치 못하게 큰 분량이어서 부담감도 있었지만"이라고 말했다.
◇ 아는 사람 딱 한 명으로 시작한 촬영장
이민지는 '백일의 낭군님' 배우 중 아는 사람이 자기 상대역인 김기두뿐이었다. 두 사람은 '로봇이 아니야'에 같이 출연하긴 했지만 붙는 씬은 없었다. 그래도 김기두의 존재는 이민지에게 큰 힘이 됐다. '아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으니 됐다'는 마음이었단다.
이민지는 "기두 오빠 덕분에 너무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워낙 베테랑이다 보니까 상황을 스스로 만들더라. 물벼락 맞는 씬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다. 애월이(한지은 분) 본다고 뺨 맞는 씬도 굳이 맞겠다고 해서 죄송하지만 때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누군가 맞는 씬은 한 번에 OK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다. 안타깝게도 NG가 많이 났다. 때렸을 때 다소 웃긴(?) 소리가 나서 촬영팀에서 웃음이 터져 다시 가게 됐다. 누구 한 명이 웃으면 금세 여기저기로 퍼졌다.
'백일의 낭군님'을 찍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낯설었던 사람들이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연기한다는 것도 매번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지 않나"라고 말문을 연 이민지는 "궁 쪽은 워낙 진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선배님들이 많으셔서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이야기할 기회가 많이 없으니까 걱정을 했는데, 막상 궁 쪽 분들이 다 성격도 좋으셨고 잘해주셨다"고 밝혔다.
현장의 분위기메이커는 박복은 아전 역의 이준혁이었다. 이민지는 "워낙 애드립 천재셨다. 몸 쓰는 것도 너무 잘하시고. 연 씨 맡은 정해균 선배님도 되게 재밌으시다. 입담이 너무 좋으시다"라며 "배우는 몸 쓰는 것도 진짜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다들) 너무 밝으셔서 계속 웃었다. 너무 친해지니 다들 그냥 눈만 마주쳐도 웃었다"고 전했다.
홍심을 돕기 위해 구돌, 아전과 함께 각설이 분장을 했던 촬영은 웃음을 참느라 특히 애먹었던 때였다. 김기두는 눈을 독특하게 떠서 시선을 피했고, 이준혁은 바닥을, 이민지는 눈을 감았다. 이민지는 그 꼴(?)을 한 셋을 보고도 감정을 유지하며 연기한 남지현이 정말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 '좋은 사람들'이 남았다
'백일의 낭군님' 배우들은 현장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각기 다른 좋은 사람들이 남았단다.
인터뷰 시간의 제약 때문에 배우들 하나하나를 거론할 수 없었지만, 좋은 분위기는 다 같이 만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극중에서 안면 소실증이 있지만 매우 똑똑한 캐릭터로 나온 김선호는 의외의 허당기로 웃음을 유발했다고 한다.
이민지는 "선호 오빠가 대사를 종종 더듬는다. 또 약간 허당기가 있으셔서 그것 때문에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극중에선) 똑똑하고 귀한 자식 느낌이었다면, (실제로는) 종이 인형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민지는 "제윤(김선호 극중 이름) 오빠는 '나 너무 심심해. 여기(궁) 너무 힘들어. 나도 송주현 가서 웃기고 싶어'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고 부연했다.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캐릭터 김차언 역의 조성하도 실은 매우 '귀여운' 인물이라고 이민지는 귀띔했다. 조성하는 더운 여름 촬영장 아이스크림 요정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다른 한 명은 도경수였다.
전작 '구해줘'에서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던 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다는 이민지는 "끝녀구나! 여기 궁 너무 재미없어~ 나도 송주현 가고 싶다"는 조성하의 말을 듣고 '귀여우시다'라고 생각했다.
"다들 제멋대로 췄죠. 근데 저희는 정말 열심히 춘 거였어요. 장난으로 춘 게 아니고요. (웃음) 그때 지현이는 학교 다니는 중이었고 경수는 컴백하고 있었고 구돌 오빠도 '신의 퀴즈' 참여하고 있었고 준혁 선배님도 작품을 하고 있었어요. (되는 때가) 딱 하루밖에 없었죠. 그때 생전 처음 SM 본사를 경험했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거기 엑소 셰이크가 있더라고요. 경수가 진짜 바쁜데도 불구하고 연습실도 빌려주고, 시간 내서 연습도 시켜주고 안무 대형도 짜 가지고 왔어요. 너무 고마웠죠. 저희가 못 따라줘서 너무 미안할 뿐이죠. 제윤 오빠도 아마 10%가 될 줄 모르고 춤추겠다고 말한 것 같아요. (웃음) 저희는 너(도경수)랑 지현이만 멋있으면 되니까 제일 어려운 곡으로 골라줘, 이랬고 그래서 '으르렁 합시다!' 이렇게 됐죠. 눈으로 안무 익혀서 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온 거예요. (웃음)"
'백일의 낭군님' 단체대화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방송 중에는 시청률 이야기로 시작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나눴고, 지금은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라도 약속을 잡아 만나려고 노력 중이다.
"시청률 나오기 전에도 현장에서 너무 재밌게 찍어서 망하진 않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대박 터질 줄은 몰랐어요. 사람 남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결과도 좋게 나오니 기쁨이 배로 왔어요. 스태프분들도 너무 좋으셨고요. 다 웃으면서 촬영했어요. 누구 하나 찡그리는 사람도 없었고요.
너무 감사하기도 한데 너무 아쉬워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 다시 한 번에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12월에 가는 포상휴가 합하면 거의 1년 가까이 '백일의 낭군님'과 같이 보낸 건데, (드라마가 끝나니) 한구석이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시원섭섭한 건 전혀 없고 계속 애틋하고 보고 싶은데 다들 바쁠 테니까… 시청자분들이 '백일의 낭군님'을 오래 기억해주시면 저희들 입장에선 좋을 것 같아요. 재미있게 봐 주셨다면 정말 다행인 것 같고요." <계속>
(노컷 인터뷰 ② 이민지 "'독립영화계의 전도연' 처음 쓰신 분 만나보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