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는 액션'이라는 김 감독의 신조대로 타격감과 현실감 넘치는 액션은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현빈 또한 자신의 역량을 액션으로 펼쳐내며 스크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창궐'은 그런 김성훈 감독과 현빈의 두 번째 만남이라 더욱 기대를 모았다.
170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창궐'은 사극 크리처물이라는 장르 외에도 독특한 지점이 존재한다. 블록버스터급의 대작임에도 10월 말 비수기 극장가에 전세계 동시 개봉한다는 점이 그렇다. 비수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창궐'의 선택은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좀비와 닮은 '야귀'가 창궐한 세상 속, 현빈과 장동건이 보여 줄 대결은 영화의 큰 축을 이룬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액션을 꿈꿨다는 김 감독에게 '창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모두 쏟아낸 작품이다. '공조'에서 모자란 부분을 메우고, '야귀'라는 크리처를 중심으로 전략을 펼쳐나갔다.
김성훈 감독은 누군가가 자신의 선택에 의문을 가진다면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들의 이야기가 영화를 완성한다는 믿음을 갖고, 미완인 '창궐'의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다음은 김성훈 감독과의 일문일답.
- 좀비의 특성과 뱀파이어의 특성 몇 가지를 가져다 붙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밤에 활동하는 크리처'를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밤 야(夜)를 써서 '야귀'가 됐다. 물론 좀비든 뱀파이어든 비슷한 행동 양식이 야귀에게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전염성이었다. 영화 제목인 '창궐'에 진행의 의미가 있는데 '야귀'의 전염성을 막는 이야기여야 했다. 위협적인 느낌보다는 '재난'이나 '전염병'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 액션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극 크리처물의 성격이 '공조'와는 상당히 다른데 현빈과 또 다시 작업을 할 정도로 '공조' 때 잘 맞았었나 보다. 실제로 '공조'에서 볼 수 없었던 매력적인 액션을 현빈에게 이끌어 내더라.
- 현빈이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역량을 '공조'를 하면서 많이 알게 됐고, 더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이지만 친구처럼 지내기 정말 훌륭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다. 늘 반듯하게 살려고 하고…. 친해지면 장난스럽고 유쾌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강림대군 이청 캐릭터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게 있었고, 그런 지점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창궐'에서 더한 것을 해낼 수 있는 경험치가 있다고 봤고, 무조건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시나리오를 탈고하지도 않고 초고 때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바로 현빈이 같이 하겠다고 하더라. 당시에는 우리 둘 만의 비밀이었다. (웃음)
▶ 역시 이 영화에서 액션 이야기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 같다. 검술이 주로 나와서 시원하면서도 날렵한 액션을 상상했는데 그게 아니라 무게감과 타격감이 상당하고 마치 슬로우 모션과 같은 큰 폭의 액션을 선보이더라. 이렇게 액션을 구상한 이유가 있나.
- 아주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쓰는 검술을 훨씬 더 실용적이면서도 생존을 위한 액션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칼을 멈추지 않고, 그 칼을 쓸 때도 다음 동작을 위해 준비하는 액션이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화 같은 그림이었다. 큰 칼의 힘이 마치 굵은 붓이 힘 있게 지나가는 것처럼, 그 강도에 따라 힘이 느껴지고 선이 살아있는 그림이 펼쳐지길 바랐다. 야귀는 춤을 추는데 붓이 확확 지나가면서 그림을 그려내는 게 이번 액션의 목표였다. 제가 연출한 액션의 특징은 특별히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펼쳐져서 진짜같이 보여지는 게 특징인데 이번에는 더 크게 펼치고 싶었다.
- 야귀의 물량만으로 설명이 다 되지 않는 게 있고, 디테일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서 지하 옥사에서는 전과 달리 최대한 가깝게 야귀와 인물을 배치했다. 실제로 어떤 위협인지 관객들에게 체험을 시켜주려고 했다. 좁은 공간 안에서 큰 칼을 쓰는 기술적 측면도 적용을 했다. 그리고 부용루와 돈화문에서는 야귀의 양이 많아졌을 때의 위협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디테일이 관객들에게 경험이 됐다고 한다면 인정전에서는 그야말로 무엇이든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영화의 한 축에 야귀의 '창궐'이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강림대군 이청이 있다. 지도자의 자리와 정치 행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그가 민초들을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인데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던 이청과 개벽을 원했던 김자준이 결국 정반대 곡선을 그리며 엇갈리더라.
- 박종사 일행을 비롯한 백성들은 자신이 살아야 하는 땅이니까 야귀를 몰아내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거다. 그런 백성들의 행위가 좋은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자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거라는 이야기다. 인정전 지붕 위에서 이청이 본 것은 도망치던 자신과 달리 궁에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그 상황과 맞서기 위해 찾아온 백성들이었다. 그게 이청이 했던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다. 김자준의 경우, 사실 동기는 전혀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변화를 위해 힘을 모으다 보면 선한 사람도 권력 의지라는 게 필요해지고, 욕망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명분이 명확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행위는 스스로 정당화된다. 변화하지 않고 반성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악이라고 생각했다. 이 역할을 할 사람은 선한 눈과 말투를 가진 장동건이라는 배우 밖에 없었다.
- 그런 해석들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맞다. 무엇을 '창궐'의 서사로 그릴 것인지 고민했을 때, 나는 희망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백성들은 도망치지 않고 자신들이 선택한 걸 위해 살아왔다. 그 마음들이 모아져 결국 이청도 변화시킨다. 마지막 횃불을 든 백성들이 몰려온 장면에 촛불 집회를 대입시켜 재현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변화를 이뤄낸 것은 맞지만 내게는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 이미 촛불의 경험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거기에서 끝나고 싶지 않았다. 닭 목을 치는 장면은 그냥 시골에서 봤던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단순한 접근이고,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됐나'라는 김의성의 대사는 의도한 것이 맞다. 내게는 그 말이 지도자가 한 말 중 가장 절망스러운 말이었다. 사실 나는 과거에 있었던 것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고, 그 다음을 생각하고 싶다.
▶ 이 정도의 예산을 들인 대작이 보통 비수기로 여겨지는 10월에 개봉하는 것도 상당히 독특하다. 칸국제영화제에서 영상 없이 포스터로만 판매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전세계 동시 개봉을 하는 것도 국내 블록버스터 영화로는 최초의 시도다.
- 원래 여름인 7월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편집이 끝나지 않아서 탈모까지 왔었다. 그 다음으로 나온 개봉일이 10월이다. 사실은 모험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영화 시장이 여름이라고, 혹은 추석이라고 다 잘 되는 게 아니다. 이들보다 작은 설날 시장을 '공조'로 늘려봤으니 10월도 잘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할로윈 시즌이라서 10월 말 개봉을 최종 결정하게 된 거다. 해외 판매가 잘 돼서 손익분기점도 제작비에 비해 많이 낮아지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성공했으면 한다. 그래서 한국 영화들이 1년 내내 자신 있게 갔으면 좋겠고, 시장을 키웠으면 좋겠다. 이런 도전은 의미 있다고 본다.
- 내 취향이 설득이 안된 것 같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가 더 있는데 1순위가 이청과 김자준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각 캐릭터들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이 캐릭터들을 궁금해 하는 정도까지만 갔다. 제한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캐릭터들 각자를 조금만 더 헤아려본다면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설명을 다 할 수 없다면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고 봤다. 배우들에게 감사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으로는 죄송하기도 하다. 지금도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쨌든 영화를 내가 설명해서 이해가 된다면 그건 잘못 만든 거다. 영화의 최종적인 완성은 관객들의 평가라고 생각한다.
▶ 야귀로 등장한 단역 배우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엔딩 크레딧에 분장을 하지 않은 그 배우들의 얼굴이 나왔는데 어떤 생각에서 그런 엔딩 크레딧을 떠올렸는지 궁금하다.
- 야귀 동작을 디자인 할 수 있는 분들이 있었고, 계속 준비를 해서 배우들이 동작을 완성했다. 일주일에도 두 세 번이나 트레이닝을 하면서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 촬영 현장에 몇 시간 더 일찍 와서 분장을 했는데 그렇게 했다고 그분들이 돈을 더 받지는 않았을 거다. 정말 감사하고 존경스러웠다. 내가 그걸 감사하게 생각해서 밥을 사거나 고기를 사는 건 별 게 아니고, 정서적으로 보람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그 분들의 맨 얼굴이 영화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드리자고 제안을 했다. 일종의 선물과 같다.
▶ '공조'에 이어 바로 '창궐'까지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숨을 고를 타이밍인가, 아니면 또 다시 작품 준비 중인가. '공조'와 '창궐' 사이 간격을 둘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지.
- '공조' 끝나고 현빈과 똑같이 일주일을 쉰 다음에 바로 '창궐'에 들어갔다. '공조' 당시에 많은 사랑을 받아서 좋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게 많았다. 전작인 '마이 리틀 히어로'가 18만이 들었고 '공조'는 780만이 들었는데 그 사이의 괴리가 괴로웠다. '마이 리틀 히어로'가 그럴 정도의 영화인가라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조'가 780만이 들을 영화인가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그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창궐'의 에너지로 삼아보려 했다. 오기로 그렇게 한 번 왔더니 지금은 좀 힘들다. '창궐'은 현재까지 내가 아는 것 말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여기도 부족한 게 있을 테니 그건 고민하면서 채워 넣어야 하는 부분이다. '공조' 개봉 후에 매일 매일 극장에 갔다. 내일부터는 아무도 안보지 않을까, 오늘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들렸다. 숫자도 영화의 완성이지만 관객들의 피드백 역시 그 완성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