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 송 : FM 98.1 (18:30~19:55)
■ 방송일 : 2018년 10월 26일 (금)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추상미 감독
◇ 정관용>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 고아와 그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신화.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떠나는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서 매회 매진을 기록하며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소개글입니다. 작품성도 매우 훌륭하지만 바로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반가운 분이라서 더 화제를 모았죠. 바로 배우 추상미 씨인데요. 지금 제 옆에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 추상미> 안녕하세요.
◇ 정관용> 감독 추상미. 그렇죠?
◆ 추상미> 네.
◇ 정관용> 이번에 처음 영화인가요?
◆ 추상미> 아니요. 단편을 두 작품 연출해서 국제영화제도 갔었고요. 이번에 장편으로서는 처음입니다.
◇ 정관용> 장편으로는 처음. 그런데 극영화는 아니고 다큐멘터리네요?
◆ 추상미> 원래 극 영화를 준비했었죠.
◇ 정관용> 이 소재로?
◆ 추상미> 네. 그런데 다큐로 먼저 사전 다큐멘터리를 먼저 만들게 됐어요.
◇ 정관용> 우선 1951년에 1500명 고아가 폴란드에 갔어요?
◆ 추상미> 네.
◇ 정관용> 왜요?
◆ 추상미> 당시에 1951년이 한국전쟁 정점기였거든요. 그때 이제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북한군이 서울 이남지역까지 밀고 내려왔죠. 당시에 발에 밟힐 듯이 많은 전쟁고아들이 있어서 정말 더 이상 전쟁을 못할 만큼 아이들을 슈용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당시에 사회주의 동맹국들의 허락을 받아서 김일성이 이 아이들을 모두 러시아 쪽으로 보내서 동유럽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합니다.
◇ 정관용> 폴란드가 사회주의니까.
◆ 추상미> 네. 당시 러시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동독, 폴란드 등지에 사회주의 동맹국가들로 보내게 되죠.
◇ 정관용> 모두 몇 명이나 갑니까?
◆ 추상미> 정확한 수는 조금씩 논문마다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폴란드로만 1500명이 갔고 다른 나라까지 합치면 수천 명의 고아들이 갔죠.
◇ 정관용> 몇 살짜리 정도가 간 거예요?
◆ 추상미> 한 4살에서 12살 정도에 갔어요. 그 사이에 있는 아이들이.
◇ 정관용> 그런 일이 있었군요.
◆ 추상미> 네, 이게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요. 십 몇 년 전에 루마니아로 간 케이스가 공중파에서 방송된 적이 있어요, 다큐로.
◇ 정관용> 그래요?
◆ 추상미> 그런데 그건 아이들의 초점이 안 맞춰졌고 그때 북한 인솔교사들이 따라갔는데 루마니아 현지 여교사와 북한 인솔교사의 사랑을 다룬 다큐영화였어요.
◇ 정관용> 그것도 독특한 작품이네요.
◆ 추상미> 그래서 그때 그 작품이 아이들이 중심이면 그게 좀 화제가 됐을 텐데. 그리고 당시에는 시국 자체가 북한전쟁 고아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그냥 유추해 볼 때에는. 그래서 그게 그냥 소리소문 없이 묻혔어요, 그 얘기가. 그때 한 번 딱 조명된 적이 있었죠.
◇ 정관용> 그런데 아까 추상미 감독께서 한국전쟁 정점기이고 북한 군이 서울 밑에까지 내려와 있던 상태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방금 북한 전쟁고아라고 그러셨는데 북한, 남한 그게 구별될 수 있나요?
◆ 추상미> 사실은 저는 서울에서 리서치할 때는 북한 전쟁고아만 해당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폴란드에 가서 이거를 2006년도에 실화소설과 다큐멘터리 폴란드 국영TV 기자가 그것을 다큐멘터리와 소설로 만들었는데.
◇ 정관용> 폴란드 내에서는 그렇게 조명이 됐군요.
◆ 추상미> 아마 그분이 이것을 파헤친 분이라. 그런데 그분께 들은 얘기가 남한 전쟁고아도 섞여 있었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저도 충격을 받았죠.
◇ 정관용> 저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전쟁 와중에 전쟁에 장애가 될 정도까지 고아가 넘쳐났다 말씀하셨잖아요.
◆ 추상미> 그런데 남한, 북한 구분도 안 되어 있을 테고.
◇ 정관용> 그러니까요. 전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긴 전쟁고아들부터 다 보낼 수 있지 않았겠어요.
◆ 추상미> 그렇죠.
◇ 정관용> 그렇게 1500명이나 폴란드로 가서 그분들 지금도 폴란드에 삽니까?
◆ 추상미> 그분들은 8년 동안 폴란드에서 폴란드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서 전쟁 트라우마가 많이 회복되고 전원 북한으로 북송이 됩니다, 남한 고아까지.
◇ 정관용> 북한으로 갔어요?
◆ 추상미> 네, 남한 고아들까지.
◇ 정관용> 왜요?
◆ 추상미> 당시에 한 두 가지 정도 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 다큐멘터리에서는 가장 큰 원인으로 천리마운동. 당시에 북한이 1958년도에 전 인민을 노동에 동원을 하는 동원령이 내려졌고 이 아이들이 이제 사춘기를 넘어서서 17~18살 이 나이가 되니까 이 아이들.
◇ 정관용> 노동력인 거죠.
◆ 추상미> 노동력인 거죠. 이 아이들을 다 보냈고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동유럽에 해빙모드가 조성이 됐어요. 그러면서 폴란드에서도 비에루트라는 사회주의 독재자가 죽으면서 약간 자유노조의 그 기미가 막 보이기 시작하는 그때여서 그런 원인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 정관용> 그런데 51년이면 벌써 지금 몇 년 지난 겁니까?
◆ 추상미> 65년.
◇ 정관용> 65년? 67년 그렇죠.
◆ 추상미> 67년이네요.
◇ 정관용> 그때를 기록한 뭐가 있기는 있어요? 다큐멘터리라면 뭔가 장면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 추상미> 아마 그 장면이 없었으면 이게 다큐멘터리가 형식이 안 됐겠죠. 인터뷰만 가지고 가야 하는데.
◇ 정관용> 장면이 있어요?
◆ 추상미> 자료가 너무 부족하고. 폴란드 국립영상자료원에 너무나 기가 막힌 당시의 아주 깨끗한 장면들이 있는데 더 퀄리티가 높은 것은 우리나라로 치면 그냥 대한뉴스 상상해 보시면 되잖아요, 옛날의 그런 자료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예술 장르가 유행을 했거든요. 아티스트들이 그 체제의 그것을 다 활용을 했는데 굉장히 예술적인 것으로 찍으셨어요. 그래서 사진작가가 찍은 북한 고아 영상이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 정관용> 그 영상 분량이 꽤 됩니까?
◆ 추상미> 저희 영화에서는 한 4분 정도니까 꽤 된다고 봐야죠, 분량이.
◇ 정관용> 그리고.
◆ 추상미> 전체는 많죠. 전체는 굉장히 많죠.
◇ 정관용> 많아요? 그 당시 기록이?
◆ 추상미> 그 자료가 엄청나게 비쌌어요. 작가의 아티스트 저작권에 해당해서. 그냥 국가 대 국가로 그런 어떤 뉴스 보도자료 같은 거면 좀 저렴했을 텐데. 굉장히 비싼 값에 구입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4살부터 한 12살 사이의 한국 고아들 폴란드말은 한마디도 모를 것이고.
◆ 추상미> 둘 사이에 사전도 없었죠.
◇ 정관용> 처음 만나서 어떻게 해요?
◆ 추상미> 선생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말 바디랭귀지부터. 이렇게 물건 사과를 보여주면서 폴란드말로 사과, 사과, 사과. 설명해 주면서 이건 사과야 그런 식으로 읽힌 거죠.
◇ 정관용> 폴란드 그 당시에 돌보던 선생님들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 추상미> 원래 300여 명의 교사가 있었는데요.
◇ 정관용> 300명이나?
◆ 추상미> 네. 왜냐하면 아이들이 1500명이었기 때문에.
◇ 정관용> 그래도요. 300명이면 5:1 아닙니까. 상당히 많이 배치가 된 셈이네요.
◆ 추상미> 그런데 지금 현재 생존해 계신 분들은 10여 분 생존해 계세요.
◇ 정관용> 만나뵈셨어요?
◆ 추상미> 다 만나지는 못했고요. 제가 가장 다큐 촬영 중에 그 부분이 안타까운데. 원장님. 다행히 굉장히 럭키하게 원장님은 살아계셨고 남자 선생님들은 많이 만났는데 여자분들이 원래 두 분이 인터뷰에 응해 주고 하셨는데 한 분은 저희가 가기 전에 큰 사고를 당해서 안면 수술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돼서 못 만났고요. 그 선생님이 가장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리고 또 한 분은 2000년대 초반에 본인이 가르쳤던 북한 고아들을 만나러 가신 분이 있어요. 사진은 제가 봤거든요.
◇ 정관용> 북한으로?
◆ 추상미> 네. 북한 정부의 초청을 받아서 감사패를 받기 위해서 가셨는데 그분은 북한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출연할 수 없다고 거절을 하셨죠.
◇ 정관용> 그래도 아무튼 몇 분은 만나뵈셨을 거고 60여 년 전 일인데 다 생생히 기억하시던가요?
◆ 추상미>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고 사진을 보관하고 계시고 아이들 이름도 기억하고 계시고 한국말도 기억하고 계시고. 그래서 이분들은 폴란드 민족적인 DNA인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지? 노인분들인데 너무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데 거기에는 이제 어떤 사연이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됐죠.
◇ 정관용> 어떤 사연이요?
◆ 추상미> 그러니까 이것을 파헤친 이유, 다큐멘터리의 주제하고도 관련이 있는 부분인데 이분들이 아이들을 회상하면서 65년이 지났는데도 다 같이 눈물을 흘리시고 너무 잘 기억하고 계시고 한 아이, 한 아이 특징. 물론 모든 아이를 기억하시지는 않지만 본인하고 친밀했던 아이들에 대해서 다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 정관용> 눈물까지 흘리고?
◆ 추상미> 눈물을 흘리고.
◇ 정관용>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
◆ 추상미> 네. 그러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부모가 그냥 어떤 이유에 의해서 생이별한 자식을 그리워하는 느낌이라고밖에는 해석이 안 되는 감정으로.
◇ 정관용> 그 정도로.
◆ 추상미> 그리워하시고. 그래서 물론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됐고 그 아이들이 간 뒤에 그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 것들을 모르시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그랬지만 이제 제가 더 깊이 들어가서 리서치를 해 본 결과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오기 한 7년 전 정도에 2차대전이 끝났거든요, 폴란드에서. 그래서 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실은 좀 비교가 불가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팩트상으로는 폴란드가 겪었던 전쟁의 참상이 훨씬 더 커요.
◇ 정관용> 자기들도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
◆ 추상미> 그렇죠. 그리고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본인이 고아인 분들이 등용이 많이 됐어요.
◇ 정관용> 동병상련이군요.
◆ 추상미>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원장님이 북한 아이들이 한국 전쟁 고아들이 기차역에서 내렸을 때 까만 머리, 까만 눈에 생전 처음 보는 동양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머나만 타국의 아이가 아니라 내 유년 시절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일부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커리큘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을 했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도록 지시했습니다라는 말을 하세요. 그래서 그냥 선행을 하신 게 아니라 거기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발견하셨던 거고 회복하셨던 거죠, 아이들을 사랑함으로써.
◇ 정관용> 진짜로 엄마, 아빠라고 불렀대요?
◆ 추상미> 네. 마마, 파파라고 불렀어요.
◇ 정관용> 그리고 8년 만에 완전히 진짜 강제 이별당한 거잖아요.
◆ 추상미> 8년을 같이 지냈는데 한 일주일 전, 작별하기 일주일 전에 통보가 내려졌죠. 전원 북송하라고. 그러니까 아이들도 굉장히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 이전에 먼저 북송된 아이들이 있었어요. 약간 학습 부진아들. 먼저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편지가 좀 문제가 됐죠. 노동을 아이들이 하고 폴란드에서 천국같이 보내다가 힘든 것들을 경험하니까. 아이들이 갑자기 두려워진 거죠.
◇ 정관용> 가기 싫어했겠네요.
◆ 추상미> 네. 그래서 안 가겠다고 눈밭에 뒹굴어서 감기 걸려서 몸을 아프게 해서 안 가려고 하는 꾀병 피우고.
◇ 정관용> 일부러 눈밭에서 뒹굴어서?
◆ 추상미> 안 가려고.
◇ 정관용> 아이고, 얼마나 절절해요.
◆ 추상미> 그러니까요. 선생님들이 그거 기억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그러시더라고요.
◇ 정관용> 선생님들도 보내기 싫었을 거 아니에요.
◆ 추상미> 마지막에는 친밀했던 아이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중에서. 그런 아이들은 좀 입양하고 싶다고 한 10여 명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선생님 몇 분이 북한대사관에 요청했는데 아마 북한 입장에서는.
◇ 정관용> 거절했겠죠.
◆ 추상미> 거절했겠죠.
◇ 정관용> 이번에 가서 만나본 선생님들은 그 후에 그 아이들을 한 번도 못 봤을 거 아닙니까? 그렇죠? 다들 그리워하죠, 지금도?
◆ 추상미> 그런데 편지를 2년 동안 보내왔어요, 아이들이.
◇ 정관용> 돌아간 후에 2년 동안?
◆ 추상미> 돌아간 후에. 그런데 그 편지 내용은 물론 공부 잘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적응한 아이의 그룹이 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 돌아가고 싶다. 저를 여기에서 좀 빼내달라 막 그런 아이들도 있었고. 그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죠, 선생님들을.
◇ 정관용> 그나저나 그렇게 돌아가서 북한에서 그들은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다큐에 그걸 담을 수도 없을 거 아니겠어요.
◆ 추상미>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있었는데 다큐에 담기는 좀 불충분했고요. 그중에 많은 분들이 엘리트층을 형성한 게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북한에 돌아가서 이 아이들이 폴란드어를 잘하고 러시아말을 잘했기 때문에.
◇ 정관용> 그렇죠, 그렇죠.
◆ 추상미> 어학 쪽으로 고등학교 언문학 선생님 그리고 대학교수. 그래서 40년 후에 대사가 되어서 북한에 돌아온 사람이 있었고. 영사가 되어서 돌아온 사람. 교환 교수로 온 사람. 이렇게 세 분.
◇ 정관용> 교환교수나 북한으로 온 게 아니라 폴란드로. 그래서 그분들이 임기를 마치고 다시 북한에 돌아간 기록은 있어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이 영화 소개에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떠나는 일화가 나오거든요. 남에서 떠난 여자는 추상미 감독일 거고 북의 여자는 누구예요?
◆ 추상미> 북의 여자는 이송 씨라고요. 배우 지망생이고 지금 연기를 공부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아가씨인데요. 이 친구를 제가 처음에 극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런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이거가 어차피 아이들, 청소년 배우가 주인공인데 남한 아이들만 다 뽑지 말고 투자를 위해서라도 주연급들은 남한을 뽑아야겠지만 조단역들은 정말 그 외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어요. 이게 시대극이고 1951년이고 전쟁 고아고. 어떤 느낌 자체가 좀 굉장히 북한 아이들처럼 생겼으면 좋겠고.
◇ 정관용> 탈북소녀 이런.
◆ 추상미> 그런 채취도 느꼈으면 좋겠고 특히 아이들이 이제 민속적인 춤이나 가락들은 북한 아이들은 굉장히 탈북 아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알고 있거든요. 몸에 익히고 있는데. 그런 부분도 또 그런 말하자면 장기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고 그래서 오디션을 거쳐서 4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배우를 뽑았어요. 뽑힌 아이 중에 가장 큰 조역으로 뽑힌 아이가 우리 이송 씨예요.
◇ 정관용> 탈북 처녀?
◆ 추상미> 네, 탈북 처녀 이송 씨.
◇ 정관용> 그런데 왜 같이 갔어요, 폴란드에.
◆ 추상미> 제가 이걸 다큐로 빨리 돌리게 되면서 제가 프리젠터를 하자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새롭게 다큐를 기획할 시간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차피 원래 목적이 시나리오의 완성을 위해서 가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 자체를 그냥 노출하는 다큐를 만들자. 한 감독이 극영화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리서치. 그러면서 이제 이 이송이라는 친구에게 연기도 가르쳐주고 역할에 대해서 설명도 해 주고. 그리고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어떤 귀덕이라는 역할이 있는데 그 아이가 거기에서 희귀병으로 죽어요 폴란드에서 실제로.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역할이기 때문에 그런 그림들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간 거죠.
◇ 정관용> 연기의 배경을 보자, 같이. 이렇게 된 거네요.
◆ 추상미> 그리고 저 혼자 보는 것보다 북한에서 온 아이가 있을 경우에 더 좋겠다 싶었는데 전혀 상관없는, 예상치 못한 송이만의 스토리가 생겨버린 거죠.
◇ 정관용> 뭐요, 어떤 스토리?
◆ 추상미> 이제 저는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송이라는 친구가 탈북 과정에서 상처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 정관용> 다 상처가 크죠.
◆ 추상미> 그래서 저는 그 과정의 어떤 경험들, 트라우마들을 이렇게 좀 기록하고 싶었어요. 시나리오에 도움을 받고 그래서. 그런데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 정관용> 입을 닫아버려요?
◆ 추상미> 그래서 굉장히 처음에 속을 많이 끓였어요. 그랬는데 폴란드 선생님을 만나면서 이 친구가 마음의 빗장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 정관용> 말을 해요?
◆ 추상미> 네. 65년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 생각이 나시잖아요, 선생님들이. 그러니까 막 물어보시는 거예요. 어떻게 넘어왔냐 지금 북한은 어떠니 막 이런 질문하시면서 안아주시고 눈물 흘려주시고 하니까 치유되고 막 울더라고요. 울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부터.
◇ 정관용> 이송의 또 치유.
◆ 추상미> 치유 스토리가 영화에 들어가게 됐죠.
◇ 정관용> 그렇군요.
◆ 추상미> 그 얘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선생님들이 이제 가르쳤던 북한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똑똑했는지 이런 얘기를 하니까.
◇ 정관용> 알겠습니다. 우선 소재부터 아주 정말 드라마틱하고 어쨌든 추상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뭘 말하고 싶은지, 마지막으로.
◆ 추상미>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상처를 새롭게 좀 재조명해 보고 싶었고요.
◇ 정관용> 상처.
◆ 추상미> 선생님들의 상처가 개인의 상처이자 역사의 상처인 그 전쟁의 경험이 다른 민족을 품는 데 굉장히 선하게 사용이 됐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저희 한국전이나 분단의 상처들이 어떻게 성찰이 되어 왔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 아픔을 좀 다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게 그냥 버려지고 폐기처분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틀 수 있고 아름다운 스토리들이 새롭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그래서 그런 상처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 정관용> 전쟁의 아픔 그 상처. 그러나 그 안에도 사랑이 흐르고 있었고 또 그 안에 서로 치유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 추상미> 상처가 아니면 드러날 수 없는 사랑이었죠.
◇ 정관용> 다음 주 수요일 개봉이죠?
◆ 추상미> 네, 맞습니다.
◇ 정관용> 보통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관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몇 십군 데 잡혔습니까, 지금?
◆ 추상미> 잡히기는 잡혔는데요. 아직은 많이 열리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좀 많은 분들이 더 관심을 가져주시면 극장도 문을 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이런 영화를 좀 많이 상영해야 돼요.
◆ 추상미> 많이 봐주시면 감사할게요.
◇ 정관용> 그나저나 이번 영화에 직접 등장도 하는 거죠?
◆ 추상미> 제가 프리젠터 역할 겸 감독이니까요.
◇ 정관용> 꼭 그렇게만 화면에서 보여주실 겁니까? 연기는 안 하세요, 이제?
◆ 추상미> 많은 분들이 너무 그리워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나중에 재미있는 캐스팅 안 되는 역할이 있다면 제가 제 영화에.
◇ 정관용> 본인 영화에.
◆ 추상미> 너무 리얼할 캐릭터라 잘.
◇ 정관용> 앞으로 감독으로 사시겠다. 그런데 내가 만드는 영화에는 출연하겠다 그런 거죠?
◆ 추상미> 그런 재미있는 발상을 해 봤어요.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출연해 봐야겠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먼저 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이번에는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 준비하시던 것도 나올 거죠?
◆ 추상미> 내년에 이제 시나리오를 써서 내후년 정도에 크랭크인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요.
◇ 정관용> 다큐부터 우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추상미> 감사합니다.
◇ 정관용> 추상미 감독, 고맙습니다.
◆ 추상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