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CBS뉴스 파워인터뷰(CBS TV, 10월 24일(수) 밤 9시 50분)
■ 진행 : 박성석 선임기자
■ 대담 : 진방주 목사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박성석> 안녕하십니까?
◆진방주> 네, 안녕하세요?
◇박성석> 들어오면서 보니까 ‘노동선교의 요람, 민주화운동의 사적지’라는 기념비의 글귀가 좀 눈에 띠던데요. 우선 영등포산업선교회 어떤 기관인지 간략히 좀 설명을 해주시죠.
◆진방주> 한국이 산업화되면서 ‘이제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들에 대한 산업전도가 필요하다’ 이래가지고 저희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58년 4월 19일에 영등포지구 산업전도회가 형성이 되면서 시작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공장복음화를 위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박성석> 1970-80년대 군부독재시절에는 이 도시산업선교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를 줄여서 ‘도산’으로 불리면서 ‘도산이 들어오면 회사가 도산한다’ 이런 어떤 거짓된 얘기도 유포를 시켰고, 용공단체니 좌익 빨갱이 단체니 이러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요. 그런 오해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도시산업선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소명과 요청이 있었다고 보시는 거죠?
◆진방주> 네,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도 그렇지만 기계처럼 완전 노예처럼 이렇게 취급당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도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고귀한 인간이다’ 그것을 이제 깨닫게 하는 데에 오히려 초점이 맞춰졌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박성석> 도시산업선교회의 60년 역사 가운데 잊지 못하는 게 1979년 8월에 발생한 YH무역 농성사건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당시에 선교회 총무였던 인명진 목사님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고요. 이 YH사건과 도시산업선교회는 어떤 관계로 연결이 되는 건지, 또 당시 이 사건은 선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굉장히 좀 궁금하거든요?
◆진방주> YH는 이제 가발업체인데, 이제 잘 되다가 사장이 미국으로 가면서 그 공장을 폐쇄를 하게 되거든요. 거기에 공장폐쇄에 맞서서 노동자들이 공장 기숙사에서 농성을 하게 되는데, 청와대건 언론이건 노동부건 다 하소연을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러한 노동자들에 대해서 이제 목사님들이 같이 찾아가고, 그 아픔을 같이 나누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같이 노력했다는 것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특별히 신민당사로 가게 된 건 기숙사가 경찰의 침탈로 위험하니까 안전한 장소로 이전하면 어떻겠느냐 그래서 결정은 노동조합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의견을 물었던 거죠. 그래서 스스로 이제 그렇게 간 것, 그 이후에 그 아픔을 같이 나눈 것. 그것밖에는 없는 거죠. 그래서 그 이후에 박정희 독재가 끝나고 나서 ‘YH사건이 야훼사건이었다’. 야훼 하나님의 YH라고요. 그래서 야훼사건을 통해서 이 군부독재가 종식이 되었다 이런 말까지 이야기하고 그랬습니다.
◇박성석>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제 도시산업선교회도 변신을 좀 꽤하기도 하고, 당시 IMF 외환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도시 실직자들, 근로자들을 위해서 노숙인 돌봄사역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사업의 형태도 좀 변하기도 했는데요. 어떤 일이 좀 있었나요?
◇박성석> 네, 목사님. 60주년을 맞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앞으로 나아갈 길은 좀 어떤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진방주> 그동안 우리 영등포산업선교회가 60년 동안 가장 초점을 맞췄던 건 지극히 작은 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거리에 있는 우리 노숙인들이나 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나 또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해고되고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 그들의 소리를 가장 중심에 두고서 그들과 함께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찾아나가는 그러한 속에서 선교활동을 해나간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박성석>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진방주> 네, 감사합니다.
[영상취재 / 정용현 정선택, 편집 / 전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