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장부 보여달란 말 차마 못 해"
19일 서울의 한 사립유치원에 5살 아들을 보내고 있는 남궁모(38)씨는 "지난 4월부터 학부모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지만, 유치원 회계 내역에 궁금한 점이 있어도 묻기가 어렵다"고 했다.
원비 외에도 1년에 180만 원씩 더 내야 하는 '기타비용'이 영어 수업, 요리실습 등에 실제 어떻게 사용되는지 도통 알 수 없는데, "'회계 장부 좀 보여주세요' 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라도 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사립유치원의 학부모 운영위는 국공립 유치원과 달리 설치 자체가 의무가 아니라 최소한의 자문기구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게 남궁씨 말이다.
남궁씨는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아이 맡겨놓은 부모 입장에선 그런 문제들을 따져 묻기가 어렵다"며 "부모 개인의 노력이나 유치원의 선의가 아닌,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학부모 김모(36)씨도 3살 딸을 보내고 있는 서울 마포구의 한 어린이집에 공식 등록된 교사 수와 실제 교사 수가 달라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이집이 갑자기 문이라도 닫게 될까 봐서다.
김씨는 "혹시 영업정지 조치라도 내려진다면, 우리 아이도 그렇지만 원래 다니던 아이들은 어떡하겠냐"며 다음 모집 시기인 연말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실제 문제 제기 나서니 "저 학부모 때문에 문 닫고 싶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노골적인 무시나 '공격'을 받는 경우도 실제 일어난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오지연(36‧가명)씨는 지난 3월 딸이 다니는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서 카시트를 갖추지 않은 채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나들이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에 나섰다.
오씨는 "어린이집 측에선 수차례 항의를 받고서야 카시트를 갖췄지만, 내게 '아침마다 그걸 챙기느라 죽겠다'며 싫은 소리를 했다"며 "기본적인 안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거면 왜 자꾸 아이들과 바깥 활동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엔 어린이집에서 자꾸만 가스 냄새가 나 문제를 제기했지만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올해 3월이 돼서야 뒤늦게 가스회사로부터 누출 사실을 확인받은 일도 있었다.
어린이집 측은 "가스가 바깥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서 괜찮다" "고치려고 해도 아파트 측에서 고쳐주지 않는다"는 등 핑계를 대며 미루다가 8월이 돼서야 이를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달에 오씨의 딸은 결국 어린이집을 나왔다.
원장은 다른 학부모들에게 "오씨 때문에 너무 힘들어 어린이집을 그만하고 싶다, 문을 닫아야겠다"더니 급기야는 유치원에서 오씨의 귀에 다 들리도록 "담임교사의 휴식시간을 방해한다"는 등의 얘기를 했다.
오씨는 "원장이 다른 학부모 앞에서 저를 욕할 정도로 모멸감을 주는데 과연 아이가 보호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며 "가까운 사이였던 학부모들도 일부는 저와 거리를 두더라"고 주장했다.
최근 회계부정 등 유치원과 어린이집 관련 논란이 계속되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17일 전국 어린이집 2000여 곳에 대해 집중점검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어 교육부도 2013년부터 5년 동안의 유치원 감사 결과를 전면 공개하겠다고 나섰다.
학부모들은 이 같은 정부의 움직임에 좀 더 구체적인 청사진을 주문한다.
학부모 단체 정치하는 엄마들 조성실 공동대표는 "유‧보 통합의 관점에서 공통의 감사 기준과 이후 정보공개가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명확하게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 유치원‧어린이집 사태가 커지는 데엔 시도교육청 시민감사관의 역할도 컸다"며 "감사 인력 부족을 호소하는 당국의 입장도 있는 만큼, 시민감사관 제도를 더 활성화해 당사자인 학부모들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