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로, 청와대 앞에서 홀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70대 유족 장경자(73)씨를 취재했다.
여수와 순천 등 전남 동부권에 총소리가 울려 퍼지던 1948년 10월 19일, 장경자 씨는 4살 이었다.
맏딸로 태어난 장 씨는 순천 철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여순사건으로 이유 없이 여의었다.
그렇게 장 씨 가족들은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텅 빈 가묘 앞에 엎드려 울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던 장 씨는 중학교 1학년 된던 해 여순사건에 대해 처음 들었다.
아버지와 같이 철도청에서 근무한 외삼촌이 "중학교에 가면 역사책에 '여순반란' 사건 이라고 나온다. 그런 줄 알아라"고 말했던 것.
장 씨는 "당시는 이승만 정권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순반란이란 용어를 의심하지 않았다"면서 "나중에서야 이 사건이 아버지를 죽음과 연관되고,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세계 역사에 기록될 만한 정의로운 역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여순사건의 역사를 파헤치기 위해 나선 것은 2010년.
그 동안 강요된 침묵으로 여순사건을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던 장 씨는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여순사건 보고서가 나왔을 때 용기를 얻고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20년 간 여순사건 여수유족회 활동을 이어왔지만 지역의 영향력에 한계를 느낀 장 씨는 녹록치 않은 가정 형편 속에서도 서울로 올라가 여순사건을 알리기 시작했다.
경기도 영종도에 낡은 방 하나를 얻어 생활하면서 10여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여순사건을 알렸고, 틈틈이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순천 철도청에 근무했던 아버지 동료를 찾아 화순, 나주, 전주 등지를 다니면서 당시 피해상황에 대한 증언서를 모았다.
장 씨는 "화순에서 만난 동료분은 눈만 뜨고 있는 반 혼수상태였는데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면서 "그 분의 부인으로부터 여순사건 피해 상황에 대한 증언서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투병하던 남편을 간호했던 몇 년간은 활동에 집중하지 못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건 남편과 사별한 뒤인 지난 8월.
'이제는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70대의 연로한 나이로 무릎, 허리 등이 아픈 상황에서도 청와대와 국회 앞을 찾아 1인 피켓 시위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청와대에서 '여순 10.19 특볍벌 제정하라'는 글이 적힌 피켓을 든 주된 목적은 여순사건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는 것.
그래야만 집권 여당이 특별법 제정 등에 앞장서 여순사건 진상규명 등의 단초를 풀수 있기 때문이다.
장 씨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순사건의 진실은 왜곡된 채 대중들에서 반란으로 기억될 것 같아 두려웠다"면서 "국가 폭력에 의해 발생한 일, 이제는 국가가 책임지고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여순사건과 관련해서도 이같은 서명운동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