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전문가 사이에 흩어져 있던 일본 측 사료와 피해자 기록을 종합한 전시회가 2일부터 서울 마포구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서 열린다.
◇ 일본군과 당국·경찰·업자 등 공모
이는 상하이의 일본인 업자 나가노가 1937년 12월 이후 "육군 특무기관의 의뢰를 받았다. 육군 위안소에 작부(위안부) 3000명이 필요하다"라며 각지의 업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영사관의 허가를 받은 업자들과 위안부 피해자들은 상하이 도착 후 곧바로 헌병대에 넘겨졌다. 헌병대는 이들이 전선까지 이동하는 과정을 책임졌다. 육군 무관실은 위안소 배치와 관련 시설을 준비하고 성병검진 등을 맡았다.
이런 사실은 '중국 도항 부녀 모집 단속에 관한 건', '황군장병위안부녀의 중국으로 오는 것에 관한 편의 제공 방법 의뢰의 건' 등 일본군이 기록한 '진중일지'를 통해 확인된다.
◇ 위안소 사진에 흰색 한복 입은 여성이
당시 사진을 보면 신체검사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 가운데 흰색의 한복, 즉 한국의 전통 의복을 입은 여성의 뒷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군 군의관이었던 아소 데쓰오는 이곳에서 조선인 여성 80명, 일본인 여성 20명에 대한 성병검사를 벌인 뒤 "조선인들은 이 일에 처음인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기록했다. 또 위안소를 '위생적인 공동변소'라고 표현하며 "창부(위안부)의 질은 연령이 낮을수록 양호하다. 전쟁터로 보내는 창부는 연령이 낮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양지아자이뿐 아니라 우미노이에, 장완전 완안루, 푸동 동거우 푸상루 6호 등 상하이에는 일본군 위안소 상당수가 몰려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 "원래 목적은 10억엔 반환이 아냐"
김 할머니는 생전 "한 사람 누울 만한 크기의 조그만 방이 많이 있는 집에 우리가 가면서 일본인 여자 2명, 조선인 여자 50명쯤 되었다"며 "군인들이 와서 먹는 것, 집의 청결사항 등을 검사했다"고 말했다.
故하순녀 할머니는 스무살 무렵 광주에서 "일본 오사카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준다"던 한국인 남성 1명, 일본인 남성 1명을 따라갔다. 하지만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 차를 타고 위안소로 끌려갔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주로 육군들을 상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상하이 위안소에 관한 사료는 그동안 소수의 전문가 사이에 흩어져 있다 최근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 서울대 인권센터 등을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엮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단체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2일부터 한달 동안 이들의 연구를 정리한 특별전시를 연다.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은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과거에 잘못됐던 것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그 부분에 대한 노력을 계속해야겠지만 우리의 원래 목적은 화해치유재단 해산도, 10억엔 반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진실을 찾고, 기억하고, 쌓아가는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이번 전시가 그 길을 열어갈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물관 측은 19일 오후 서울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일본군과 위안소'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