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에서도 사기도박의 피해자라고 무죄를 선고 했어요. 그러면 상식적으로 검찰이 사기도박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요?"
A씨가 취재진에게 서류 뭉치를 건넸다. 판결문에서부터 피의자신문조서, 영상분석보고서까지 수 천 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A씨는 서류와 함께 자신의 노트북에서 영상 자료를 보여줬다. 캄보디아의 한 카지노에서 블랙딜러(승부를 조작하는 딜러)가 게임 중 밑장빼기(아랫쪽에 있는 패를 꺼내 유리한 패를 자신이 가지거나, 상대에게 불리한 패를 나누어주는 기술)를 하는 모습이었다.
영상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지만 취재진은 딜러가 밑장 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다.
영화 '타짜'에서 유명세를 탄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명대사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했는데도 몰랐어요. 캄보디아가 사기도박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던 거죠"
◆ 2014년 검찰의 대대적인 해외 원정도박 보도
2014년 6월 A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캄보디아의 한 카지노에서 바카라 도박을 했다. A씨는 1박 2일 동안 우리 돈으로 약 60억 원(600만 불)을 잃고 돌아왔다.
A씨는 2015년 7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강력부의 원정도박 수사 사건 피의자로 구속됐다. 검찰은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의 원정도박 사건과 함께 A씨 사건을 언론에 공개했다.
검찰 수사에서 A씨는 사기도박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캄보디아에서 도박할 때 "카지노에서 커피를 제공했는데 약을 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실제 A씨는 당시 카지노에서 커피 때문에 직원들과 몸싸움을 했다.
카지노 측은 CCTV 자료를 제출하며 커피에 약을 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CCTV 자료는 기간이 지나면 삭제되지만 A씨가 사기도박을 주장하는 상태여서 카지노 측이 보관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A씨는 사기도박 피해를 끝내 입증하지 못했고 2016년 1월 1심 판결에서 도박혐의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A씨에게 캄보디아 카지노 도박을 주선했던 일당 3명은 도박장 개설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 사기도박 없었다던 CCTV 증거, 카지노 발목 잡아
검찰은 CCTV 영상에서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1심 판결 다음부터다.
A씨 측은 CCTV 영상을 가지고 전국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전직 블랙딜러로 활동하던 B씨를 만났다. B씨는 CCTV 영상을 보고 '밑장빼기'가 시도된 것을 바로 알아봤다. B씨는 "캄보디아 현지 블랙딜러 팔의 움직임과 각도, 카드를 짚는 손가락의 위치 등을 볼 때 전형적인 밑장빼기가 맞다"고 말했다. B씨는 직접 밑장빼기를 시연하며 어떻게 사기도박이 이루어졌는지 설명했다.
캄보디아 카지노 딜러는 1박 2일 동안 40회 가량 밑장빼기를 시도했다. 게임은 대부분 A씨가 패했거나 무승부로 끝났다.
A씨 측은 영상분석 연구소에 밑장빼기가 시도된 것이 맞는지 의뢰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카지노 전문 연구소에도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의뢰한 곳 모두에서 밑장빼기가 시도된 것이 맞다는 보고서를 보내왔다.
직접 밑장빼기를 한 캄보디아 카지노 직원도 만났다. 캄보디아 카지노 직원은 A씨 측에게 "당신이 카지노 VIP룸에서 게임을 했고 돈을 잃을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은 "블랙딜러가 맞다"며 "매니저가 신호를 주면 A씨의 카드를 바꿔치기했다"고 실토했다.
A씨는 2심 재판부에 밑장빼기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2016년 6월 서울중앙지방법원 2심 재판부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CCTV 동영상 결과 밑 밑장빼기 시연 영상, 전문가 영상 분석 의견서, 블랙딜러 진술서 등을 종합해보면 승부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A씨가 사기도박 범행의 피해자로 끌어들여졌을 가능성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검찰은 A씨가 사기도박의 피해자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 검찰이 잘못 다룬 사건, 경찰이 다시 수사
상고 기각 후 검찰은 사기도박 관련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A씨에게 밑장빼기를 지시한 캄보디아 카지노 업체 관계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처벌을 받은 사람은 A씨를 카지노로 데려간 유인책 3명이었다. 하지만 혐의는 사기도박이 아닌 도박장 개장죄였다.
도박장 개장은 처벌 형량이 낮지만 사기도박을 주선한 경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받기 때문에 처벌 수위가 훨씬 높다.
결국 해당 사건은 지난해 경기남부경찰청 국제수사대가 다시 수사를 진행했다.
재수사를 시작한지 1년이 훨씬 지난 올해 9월, 경찰은 A씨를 카지노로 유인했던 사기도박 관련자들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번에는 캄보디아 카지노를 운영하는 관계자들도 피의자 신분으로 넘겨졌다.
현재 사기의 경우 피해 금액이 50억 이상 300억 원 미만일 경우 보통 징역 5년에서 8년까지 중형이 내려진다.
이번 사건은 사기도박 사건은 피해액만 60억원 수준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피해 수법과 규모를 고려할 때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다.
대형 사건인데도 왜 구속 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냐는 취재진 질문에 대해 경찰 측은 "수사가 진행되는 내용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공식 답변을 피했다.
공식 답변이 이렇다는 것이고,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한 분위기다. 바로 검찰에 대한 눈치다.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이 수사했던 만큼 검찰의 과거 수사를 경찰이 뒤집어야하는 만큼 안팎의 갈등과 내부 고민 그리고 심적 부담이 컸다는 후문이다.
이번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수원지방검찰청 강력부의 입장은 어떻까?
수원지검 관계자는 "기소 의견으로 경찰로부터 사건이 넘어왔고 해당 사건을 현재 검토 중이다"며 "정확한 수사를 위해 경찰에 보완 수사를 지시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수사를 놓고 경찰과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원지검은 최근 해당 사건을 과거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중앙지검으로 다시 이송했다.
사건이 이송되면 1년 넘게 사건을 지휘했던 수원지검이 아닌 서울중앙지검에서 새로 수사를 진행하게 된다.
한편, 2015년 A씨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서울중앙지검 정용환 검사(현 대구지방검찰청 영덕지청장)는 사건 경위에 대해 "당시에는 커피 약물로 사기도박을 조사했기 때문에 무혐의가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 검사는 이어 "만약 자신이 CCTV와 같은 사기도박과 관련 자료를 받았다면 적법한 절차로 처리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