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 관련자들의 압수수색영장을 줄기각해 온 법원이, 검찰이 청구한 첫 구속영장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법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허경호 부장판사는 20일 "변호사법위반을 제외한 나머지는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등, 죄가 되지 않거나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존재한다"며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현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러면서 "피의사실과 관련된 문건 등을 삭제한 것을 들어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를 했다고 평가할 수 없고, 그 밖에 문건 등 삭제 경위에 관한 피의자와 참여자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볼 때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유 변호사의 변호사법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공무원 재직 당시 피의자의 직책·담당업무의 내용 등에 근거한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는 점, 이 부분 관련 증거들은 이미 수집돼 있는 점 및 법정형을 감안할 때 구속의 사유나 필요성·상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법원이 발표한 '장문'의 기각사유에 즉각 반발했다. 검찰 관계자는 "피의자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담한 방식으로 공개적으로 증거인멸을 하고, 이에 대해 일말의 반성조차 없었던 그간의 경과를 전 국민이 지켜본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피의자에 대해 '증거인멸의 염려가 없다'고 명시하면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사법농단 사건에 있어서는 이런 공개적·고의적 증거인멸 행위를 해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또 영장판사가 발표한 장문의 기각사유를 두고 "어떻게든 구속사유를 부정하기 위해 만든 '기각을 위한 기각사유'에 불과하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유 변호사는 2014년 2월부터 지난해까지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하면서, 후배들이 작성한 보고서와 판결문 초고 등 수만 건을 올해 초 퇴직하면서 무단 반출한 혐의를 받는다.
유 변호사는 또 2016년 초,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진료'를 맡았던 김영재 원장 측의 특허분쟁 관련 자료를 법원행정처를 통해 청와대에 전달한 의혹도 받고 있다.
이에 검찰은 유 변호사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검찰이 이미 확보한 비선진료 관련 문건 1건에 대한 영장만 발부했다. 당시 영장판사 역시 허경호 부장판사였다.
이처럼 영장이 번번이 기각되는 사이 유 변호사는 해당 증거자료들을 파기했다. 그는 지난 9일 검찰조사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대법원 측에만 통보했다.
영장이 계속 기각되자 검찰은 유 변호사가 대법원에 근무할 당시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숙명여대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이 소송을, 변호사 개업 후 수임한 사실을 포착해 변호사법위반 혐의까지 이번 영장청구서에 포함했다.
유 변호사에 대한 영장 기각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법원이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고위법관들의 '압수수색'영장마저 기각하는 상황에서, 신병을 확보하는 강제성 높은 구속영장까지 발부할리 있겠냐는 게 중론이었다.
검찰은 이번 추석 연휴기간 동안 보강수사 등 재정비 시간을 가진 뒤,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수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