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21세기 디지털 독재를 경계하라"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민주주의는 독재보다 우월할까, 왜?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는 이를 정보처리와 연관 지어 통찰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민주주의는 정보처리와 결정 권한을 분산하는 반면 독재는 한곳에 집중시킨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를 한곳에 모으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누구도 많은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소련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원인도 결국 정보처리의 비효율성에 있다는 것이다.

하라리 교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건 어디까지나 20세기 얘기라는 것. 인공지능(AI)이 정보처리와 판단을 대신하기 시작한 21세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AI는 정보량에 구애받지 않을 뿐 아니라 정보가 집중될수록 훨씬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20세기에는 독재에 장애가 됐던 정보집중이 21세기는 독재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쓴 하라리 교수는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 펴냄)에서 생명기술과 정보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정치·사회에 미칠 영향을 분석한다.

전작들이 인류의 과거를 조명하고 미래를 전망했다면, 이 책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인류의 현재에 집중한다. 말하자면 과거에서 미래, 현재로 이어지는 '인류 3부작'을 완성한 셈이다.

역사적인 서사 형식을 띤 전작들과 달리 대중과의 대화 속에서 쓴 21편의 글을 모았다.

책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를 지배했던 자유주의가 고장 났다고 진단한다. 자유주의는 공산주의, 파시즘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긴 뒤 인류에게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화, 자유화의 모순과 한계가 드러나면서 신뢰가 추락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과 브렉시트, 세계 곳곳에서 권위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현실을 이를 방증하는 사례로 든다.

이런 가운데 가속화하는 생명기술과 정보기술 혁신이 자유주의에 대한 불신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제조업에 기반을 둔 20세기 산업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체제여서,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기술 분야의 혁명적 변화에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은 경제와 사회뿐 아니라 신체와 정신, 생명까지 통제함으로써 인간을 '신'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발전이 미래의 기회이자 현재의 위기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라리 교수는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수십억 명의 일자리를 뺏고 인류가 이룩한 근대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인간의 권위가 빅데이터 알고리즘으로 넘어가고, 권위주의 정부가 알고리즘을 이용해 시민들에게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른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전망한다.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는 현재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은 '디지털 독재'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술 혁명이 모든 부와 권력을 극소수 엘리트에게 집중시키고 대다수를 쓸모없는 무용(無用)계급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인류를 전례 없는 불평등 사회로 이끌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하라리 교수는 기술적 도전이 크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해도 우리가 두려움을 조절하고 조금씩 겸허해진다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술이 완성돼 인류를 함정에 빠트리기 전에 먼저 고삐를 잡을 수 있도록 빠르게 움직이고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가까운 미래에 알고리즘은 이 과정이 완결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관한 실체를 관찰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질 수 있다. … 앞으로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직은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탐사할 수 있다."

전병근 옮김. 572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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