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붓 들었던 주부, 페미니즘 대모로 거듭나다

윤석남 작가 개인전, 다섯번째 <핑크룸> 선보여

작품 <핑크룸>앞에서 포즈를 취한 윤석남 작가 (사진=조은정 기자)
1979년 마흔살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한 여성이 붓을 들었다. 순전히 살기 위해서였다. 30대 때부터 왠지모를 불안감과 우울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남들이 보기엔 행복한 중산층 주부였지만 정작 사는 의미를 찾지 못했다.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서의 무게감이 자아를 짓눌렀다. 하루하루가 뾰족한 가시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미술을 배워본적도 없던 그녀는 붓을 들자마자 무섭게 몰두했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새벽 3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겨우 숨쉬는 이유를 찾았다. 하지만 지금도 매일밤 30대 시절의 악몽을 꾼다.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1939)작가의 이야기다.

"오래살고 싶어요. 채색화를 잘하고 싶어서…"

1939년생. 올해로 여든이 된 윤 작가는 나이를 무색케하는 열정을 뿜어내고 있다.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그녀는 끊임없이 배우고 진화하고 있다. 민화에 영감을 받아 3년 전부터 채색화를 시작한 뒤 전통붓을 통한 선의 아름다움과 특유의 색감에 푹 빠져있다. 생각이나 사고방식은 젊은이들보다 더 싱싱했다.

8,90년대 '어머니'라는 주제로 여성의 불안한 내면과 모성에 대해 탐구했던 그녀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2003년부터는 김만덕, 허난설헌, 이매창 등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는 역사 속 여성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죽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여성들을 화폭에 담는게 꿈이다.

이번에 학고재에서 전시되는 작품 <핑크룸>은 그림을 그리기 전 불안했던 내면을 표현한 윤 작가의 대표 작품이다. 1996년에 첫 핑크룸을 선보인 뒤 다섯번째 핑크룸이다. 손이 곱을 정도로 일일이 수백개 한지를 오리는 수고스러움때문에 아마 마지막 핑크룸이 될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고 그저 살기위해 그림을 시작했지만 전시회를 하면서 많은 여성 활동가들을 만나고 여성학을 접하게 됐다. 해외에서는 윤 작가를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 평가하며 그녀의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그림을 안 했으면 그냥 흐지부지 살게 됐을 것 같아요. 그 생각을 하면 너무 공포스러워요. 지금도 밤마다 젊은시절로 돌아가는 악몽을 꾸는데 이게 제 개인적 심리의 특성인지, 여성으로서 받은 억압 때문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여성작가로서 처음으로 이중섭미술상(1996)을 받았고, 2년 전 테이트 콜렉션에서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뭘 더 바랄게 있을까 싶은 화려한 이력이지만 여든의 작가는 "더 배우고 싶다. 더 잘그리고 싶다"며 소녀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미투를 어떻게 바라볼까?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어요. 겉으로는 바뀐 것 같은데 실제 사람들의 의식은 쉽게 안바뀌어요. 아직도 힘들어하는 여성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죠"

붓을 든지 40년. 바뀐듯 바뀌지 않은 세상은 그녀가 계속 그리고 배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전시는 서울 정로구 삼청동 학고재 신관에서 10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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