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 "욱일기·우토로·위안부...기억해야 역사다"

충칭 임시정부 발자취 찾아 오늘 출국
우토로 마을, 지금까지도 '하수도' 없어
싸우면서 지켜온 우토로 마을...기억하자
14일, 위안부 故김학순 할머니 첫 증언일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역사강사 최태성(기억할게 우토로 캠페인)

일제 강점기에 우리 국민들 참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에 착취를 당했죠. 징병된 분들도 있고 위안부로 끌려간 분들도 있고 미쓰비시 같은 곳에 노동자로 끌려간 분들도 있고.
그런데 여러분, 우토로 마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여기에도 굉장히 많은 수의 조선인이 끌려가서 살았는데 이 우토로 마을에 평화 기념관 건립 캠페인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이 캠페인에 직접 참여하고 계신 분, 스타 역사 강사죠. 최태성 선생님 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 최태성> 안녕하세요. 최태성입니다.

◇ 김현정> 우리 우토로 얘기하기 전에 말이죠. 앞서 '욱일기 반대 캠페인'을 하고 계시는 디자이너 분과 인터뷰를 했거든요. 들으시면서 많은 분들이 그런데 그 욱일기의 태양이 쫙 퍼지는 듯한 모양은 도대체 뭘 상징하는 거냐, 무슨 의미냐 물어보시네요.

◆ 최태성> 사실 그 문양 같은 경우에는 예전부터 일본에서 사용되었던. 민간에서는 복을 준다, 그런 의미로 사용됐던 문양이기는 해요. 이제 그런데 그게 1870년도에 일본 육군 창설 과정에서 그게 일본 육군 깃발로 사용이 되거든요. 그리고 89년도에는 해군 깃발로 약간만 모양만 바뀌어서. 그러면서 이제 이게 군대의 어떤 깃발로 사용됐는데 문제는 뭐냐, 일본이 주변 국가를 침략을 했잖아요.

◇ 김현정> 침략을 했죠.

◆ 최태성> 그 침략의 선봉에 있었던 게 군대잖아요. 그 군대가 들고 있던 깃발이 바로 욱일기가 되는 것이죠.

◇ 김현정> 그렇군요.

◆ 최태성> 그렇기 때문에 이 욱일기는 일본 군극주의,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적인 어떤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 김현정>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 욱일기 사용하지 말자.’ 이 캠페인이 앞에서 우리가 소개한 캠페인이고 그나저나 최 선생님은 오늘 중국 떠나신다면서요?

◆ 최태성> 저 지금 인터뷰 마치면 바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대장정이 있거든요. 거기에 지금 참여해서 갈 예정입니다.

◇ 김현정>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함께하는 독립대장정 2기.

◆ 최태성> 맞습니다. 작년에 1기로서 상해 중심으로 다녀왔고요. 이번에는 충칭 위주로 갈 생각입니다.

◇ 김현정> 충칭? 사실 상해 하면 1919년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곳이라 누구나 잘 알지만 충칭은 좀 생소해요. 왜 충칭인가?

◆ 최태성>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크게 2개의 시기로 나눌 수가 있어요. 첫 번째 1기가 바로 상하이 시기고 2기가 충칭 시기인데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1932년 윤봉길 의거 아시죠?

◇ 김현정> 윤봉길 의사의 의거.

◆ 최태성> 바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 의거. 이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본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 김현정> 그렇죠.

◆ 최태성> 그때부터 이동을 시작을 하는 거예요. 무려 8년간 계속 중국의 반바퀴를 돌아서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1940년 충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광복을 준비했던 그런 시기가 바로 충칭의 시기였다, 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김현정>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그게 계기가 돼서 충칭으로. 그러면 충칭 임시정부 시기는 사실은 한 6년 정도밖에 안 되는 건데 짧지만 아주 중요한 시기군요.

◆ 최태성> 그렇죠. 왜냐하면 이때 이제 우리 임시정부의 어떤 산하 부대라고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도 창설되고 건국 강령도 만들어지고 명실상부 광복을 준비했던 그 시기가, 중요한 시기가 충칭 시기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현정> 그러네요. 바로 거기로 오늘 인터뷰 직후에 떠나십니다.

◆ 최태성> 잘 다녀오겠습니다. (웃음)

◇ 김현정> 그래요. (웃음) 충칭 얘기를 잠깐 했는데 사실 오늘 인터뷰를 모신 이유는 우토로 마을 때문이에요. 우리가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이야기라든지 군함도 이런 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많이 압니다마는 우토로 마을은 여전히 생소하다 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 최태성> 그렇죠. 이곳은 일제 강점기, 즉 1941년에 일본 교토에 비행장이 건설되려고 해요. 비행장이 건설되려면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 김현정> 그렇죠.

◆ 최태성> 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바로 조선인 노동자들로 모집이 돼요. 무려 1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교토 비행장 건설을 위해서 모집이 되거든요.

◇ 김현정> 지금의 1300여 명하고 1941년의 1300여 명은 아주 다른 거잖아요. 엄청난 숫자잖아요, 1300명.

◆ 최태성> 어마어마한 숫자죠. 그래서 동원되던 노동자들이 활주로를 닦는다든지 당시 미군의 폭격이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대나무를 덮어야 되고 그러거든요. 그런 어떤 과정에서 공항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가 갑자기 패망을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서 노동자들이 그냥 졸지에 방치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 김현정> 조선으로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대접을 받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버려진 거예요?

◆ 최태성> 그렇죠. 왜냐하면 이분들 같은 경우에는 정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정말 생계 노동자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일제가 갑자기 망하는 바람에 보상이나 이런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돈조차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죠.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곳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던 곳, 그곳이 우토로 마을의 역사의 출발이 되는 겁니다.

◇ 김현정> 미쯔비시 같은 데 끌려갔던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가기만 하면 뭔가 엄청난 보상을 해 줄 것처럼 그리고 고국으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을 것처럼 꾀어가지고 데려가, 거의 납치 수준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 최태성> 그렇죠.

◇ 김현정> 사기를 당한 수준인데 여기 갔던 분들도 다 그런 식으로 끌려가신 거예요?

우토로 마을 (사진=최태성 제공)
◆ 최태성> 그런 형태도 있고요. 또는 일자리잖아요, 어쨌건 간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아야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일자리를 찾아서 자발적으로 간 경우도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제 강점기라는 시스템 속에서의 ‘자발’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강제’의 모습일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지역이 사람이 살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니었어요. 여기가 저지대라서 비라든지 태풍만 오면 마치 폭탄 맞은 듯이 그냥 정말 엄청나게 망가져버리는 그런 곳이에요. 게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 몇십 년 동안 이 마을에는 상하수도가 들어오지 않아요.

◇ 김현정> 세상에.

◆ 최태성> 상수도와 하수도가 없는 곳에서 무려 1000명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라는 것은 이건 굉장히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 김현정> 어떻게 살아요? 특히 상수도도 상수도지만 하수도 없이 어떻게 살아요?

◆ 최태성> 그러니까요.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거예요. 사실은 이건 한국과 일본의 어떤 문제가 아니라 이거는 보편적 인류의 ‘인권’의 문제죠. 사실 이 문제를 맨 처음 제기한 것은 일본 시민단체였어요. ‘이거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들을 방치해 놓고 살 수 있도록 하느냐’라고 해서 일본 시민단체에서 이게 문제가 제기돼서 확산되었는데 이게 1988년도에 드디어 상수도가 설치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해잖아요.

◇ 김현정> 1988년이요?

◆ 최태성> 네, 45년 패망 이후 88년까지 상수도가 없었던 거예요. 더 놀라운 건 뭐냐 하면 지금까지도 하수도가 설치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2018년 지금까지도.

◇ 김현정> 선생님,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사실 앞서가는 이른바 선진국 아닙니까?

◆ 최태성> 선진국이죠. 그렇죠.

◇ 김현정> 1988년에 우리 모습 떠올리면 우리가 어땠는데. 그 당시에 일본에 상하수도가 안 들어오는 마을이 존재했다?

◆ 최태성> 그러니까요.

◇ 김현정> 믿기지가 않네요.

◆ 최태성> 정말 그렇게 인권 유린에 방치되어 있는 그런 현장 속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싸워왔던,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좀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라는 차원에서 지금 우토로 얘기를 하는 건데 사실 원래 거기 소유주는 일본 ‘닛산’ 아시죠?

◇ 김현정> 닛산자동차 할 때 그 닛산?

◆ 최태성> 네, 그 닛산차체가 거기를 원래 소유하고 있었는데 88년 상수도 설치되면서 바로 그걸 팔아버려요. 그걸 매입했던 ‘서일본식산’이 거기 살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한테 퇴거를 요구한 거죠. ‘개발한다. 나가라’ 라고 얘기를 했던 것이고 거기에 살고 있던 우토로 마을은 우리가 45년 일제 패망부터 방치돼서 여기를 만들어왔던 곳인데, 우리가 지켜왔던 곳인데 여기를 나갈 수 없다. 여기는 우리가 만든 곳이다, 라고 하면서 대립하게 되었던 것인데 일본 대법원에서 결국은 강제 퇴거 명령을 내리게 돼요. 정말 퇴거의 위기가 닥쳤던 곳인데, 이때 정말 기적이라고 하면 기적이겠죠. 이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게 된 거예요. 그래서 2005년부터 아름다운재단과 여러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서 성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 김현정> 아마 아시는 분들 아실 거예요.

◆ 최태성> 9억여 원이 모여졌고 우리 정부에서도 지원금 한 30억 정도가 모여져요. 그 돈을 가지고 우토로 마을의 일부 땅을 매입을 합니다. 그 일부 땅에다가 시영 아파트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시영 아파트에 강제 철거될 수밖에 없는 주민들이 옮겨 살게 되는 그 모습으로 일단 지금은 해결이 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지금 보이고 있습니다.

◇ 김현정> 얼마나 남아 계세요? 조선 그 당시 끌려왔던 분들 또 그분들의 후손 얼마나 남아 계세요?

◆ 최태성> 지금은 1세대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요. 그때 오셨던 1세대 중 딱 한 분만, 강경남 할머님 90세가 넘으신 분이 한 분만 계시고 나머지는 다 그 후손들이 지금 그곳에 계십니다.

◇ 김현정> 대략 얼마 정도 남아 계세요?

우토로 1세대 생존자인 94세 강경남 할머니와 최태성 강사
◆ 최태성> 지금 시영 아파트, 지금 지어진 시영 아파트에 39세대가 일단 들어가셨고요. 그리고 지어질, 새로 지어질 2차 시영 아파트에 20세대가 들어갈 예정이세요. 그래서 이 정도 분들이 지금 현재 거기 우토로 마을에 계신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김현정> 그러니까 1세대 강경남 할머님 한 분만 살아 계시는 거고. 나머지는 돌아가신 거고요. 후손들이 지금 한 60여 세대가 지키고 있는 거죠.

◆ 최태성> 그렇죠.

◇ 김현정> 알겠습니다. 버려진 땅에서 일굴 수 있는 데까지 일구면서 사셨던 거다, 이렇게 보면 되겠군요.

◆ 최태성> 그렇죠. 더 놀라운 거는요. 그렇게 일제가 패망되고 그들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교에 다니지 않아요. 그 자제분들을 조선인 학교를 만들어가지고 그곳에서 조선인 교육을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던 모습이 정말 감동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거든요. 지금도 우토로 마을에 가시면 센터가 있어요. 거기서 한글 교육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쨌거나 해방 이후에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그런 노력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참 감동을 주는 모습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 김현정> 그래서 우리가 벌이는 캠페인. ‘기억할게 우토로 캠페인’

◆ 최태성> 맞습니다.

◇ 김현정> 어떤 캠페인이에요? 선생님도 참여하고 계시는 건데.

◆ 최태성> 일단 거기가 철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철거되면 이제까지 그분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기 위해서 싸웠던 그 투쟁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공간이 없어지는 거니까.

◇ 김현정> 그렇죠.

◆ 최태성> 그래서 그분들의 어떤 역사를 남겨둘 필요가 있겠다, 라고 해가지고 ‘우토로 평화기념관’을 그 아파트 두 채 옆에다가 또 세우려고 하는 거예요.

◇ 김현정> 그분들 입주하시는 시영 아파트 옆에다가 기념관을?

◆ 최태성> 터가 또 하나 있거든요. 그 터에다가 지금 우토로 평화기념관을 지금 세워서 기억을 보존하자, 라는 차원에서 그 평화기념관을 만들기 위한 그런 캠페인. 캠페인을 지금 시작하고 있는 것이죠.

◇ 김현정> 그런 거군요. 많은 분들이 참여하셔야 모금도 되고 그럴 텐데.

◆ 최태성> 김혜수 씨, 유재석 씨, 하하 씨도 이런 분들이 지금 앞서가시면서 많이 홍보하고 있는데요. 혹시 관심 있으시다면 아름다운재단 사이트가 있거든요. 들어가시면 돼요. 그럼 바로 우토로 마을 평화기념관을 세우는 데 동참하실 수 있는 방법들이 아주 자세히 잘 나와 있습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역사 강사 최태성 선생님 지금 만나봤습니다. 오늘 광복절입니다. 사실은 우리 이제 위안부 할머님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어제가 위안부 기림일 첫 번째 기림일이었어요.


◆ 최태성> 정말 의미 있는 그런 날이었죠.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날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8월 14일이었습니다.

◇ 김현정> 왜 14일인가. 15일도 아니고 왜 14일이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게 의미가 있는 날이죠?

◆ 최태성> 의미가 있죠. 8월 14일이 어떤 날이냐면 위안부 할머니셨죠. 고 김학순 할머니께서 27년 전 즉 1991년 8월 14일 이때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신 날이세요.

◇ 김현정> 첫 번째, 세상에 이런 피해자가 있었습니다, 라는 걸 처음으로 알린 그날.

◆ 최태성> 그럼요. 여성으로서 그 사실을 알린다는 건 어마어마한 용기가 요구되고 있는 거잖아요.

◇ 김현정> 물론이죠.

◆ 최태성> 이분이 처음으로 그걸 말씀하시면서 이제까지 이야기하지 못하셨던 많은 분들이 용기를 내시고 240여 명의 증언을 끌어내시면서 이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적 차원의 인권의 문제로 부각시켰던 그날이 바로 8월 14일이기 때문에 이 날을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만든 것입니다.

◇ 김현정> 기억을 하자는 건데 여러분, 그러니까 결국은 우토로도 ‘기억할게 우토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기림일도 역시 기억하자는 날이에요.

◆ 최태성> 그렇죠. 맞습니다.

◇ 김현정> 마지막 질문은 제가 거창하게 드릴게요, 최 선생님. 역사를 기억한다라는 건 이건 어떤 의미입니까?

◆ 최태성> 일단 지금 말씀하셨던 일제 강점기에 참 우리를 아프게 했던 위안부라든지 강제 동원의 시간, 또 광복 이후 차별 속 우토로 조선인들의 시간, 이런 게 다 모두 기억의 형태들이잖아요.

◇ 김현정> 그렇죠.

◆ 최태성> 기억에는 이렇게 다양한 유형들이 있는데 이런 기억들을 우리가 담고 있어야겠다. 왜일까? 기억해야 역사가 되기 때문이겠죠.

◇ 김현정>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사실은 남아 있는 건데 그걸 잊는 순간 과거는 되풀이될 수 있어요. 언제든지 그 가능성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 최태성> 맞습니다. 그래야 역사로 남기 때문입니다.

◇ 김현정> 맞아요. 오늘 광복절에 다시 한 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은 뭔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최 선생님, 중국 충칭 잘 다녀오시고요.

◆ 최태성> 잘 다녀오고요. 잘 기억하겠습니다.

◇ 김현정> 저도 잘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최태성> 감사합니다.

◇ 김현정> 역사 강사죠. ‘기억할게 우토로 캠페인’에 참여하고 계신 분 최태성 선생님 만나봤습니다. (속기= 한국스마트속기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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