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최고급 아파트에는 그 집을 지은 노동자들이 산다"

최대 제제 속에서도 활기찬 북한의 일상
스마트폰, 굉장히 일상화 되어 있어
평양 外 지역도 곤궁하다는 느낌 없어
73층 아파트, 건설 노동자 & 원주민 배정
길거리 학생들 남한 언론 불신 커 '슬픈 자화상'
'콩나물 시루 출근길'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삶
북한 콘텐츠 볼 수 있는 '통일TV' 준비 중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19:55)
■ 방송일 : 2018년 8월 1일 (수) 오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진천규 기자

◇ 정관용>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마는 지구상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북한이죠. 그런 북한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단독취재를 한 분이 있습니다. 재미 언론인 진천규 기자인데요.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무려 네 차례나 평양을 직접 방문하고 그 취재기를 담은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이 책을 펴내셨네요. 오늘 스튜디오로 직접 모셔봤습니다. 진천규 기자, 어서 오십시오.

◆ 진천규> 네,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 정관용> 통일기자로 잘 알려지신 분이시잖아요.

◆ 진천규> 네.

◇ 정관용> 처음 언론인 생활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셨죠?

◆ 진천규> 제가 한겨레신문에서 창간 때 시작을 했습니다. 사진기자로.

◇ 정관용> 그럼 88년?

◆ 진천규> 88년도. 그리고 86년도는 사실 경인일보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수원에. 경인일보에서 기자생활 시작을 하다가 한겨레신문 창간하면서 경력기자로 입사를 했습니다.

◇ 정관용> 언제까지 근무를 하셨던 거예요?

◆ 진천규> 2000년 6. 15정상회담 마치고 2001년도에 제가 미국으로 취업 이민을 갔죠.

◇ 정관용> 그러니까 그 당시 한겨레신문에 계실 때에도?

◆ 진천규> 사진기자로 해서 92년도에 남북 고위급회담, 6차 평양에서 했습니다. 그때 제가 처음 방북을 했고요. 그리고 2000년도에 이제 그때 당시는 한겨레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또 운 좋게 풀기자로 해서 수행취재를 했습니다.

◇ 정관용> 2000년 6. 15 정상선언 나오는 현장?

◆ 진천규> 맞습니다, 바로.

◇ 정관용> 그렇게 두 번 과거에 다녀오셨고.

◆ 진천규> 그렇습니다.

◇ 정관용> 작년 10월부터. 책을 보니까 불과 얼마 전인 7월.

◆ 진천규> 7월 7일 돌아왔습니다.

◇ 정관용> 7월 7일까지 평양에 계셨더라고요?

◆ 진천규> 그렇습니다.

◇ 정관용> 들락날락하신 거죠?

◆ 진천규>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 정관용> 어떻게 우선 가시게 된 겁니까?

◆ 진천규>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여권을 가지고 있고요.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3국의 영주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통일부에서 허가사항이 아니고 신고를 하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폭이 넓죠. 그래서 저는 다 합법적으로 다니고 있고요. 그렇게 이제.

◇ 정관용> 북한에서 입국을.

정관용 진행자(좌)와 진천규 기자(우)(사진=시사자키)

◆ 진천규> 비자를 받아야 되죠, 북쪽의 비자를 받아야 되는데 제가 이제 강연을 다니거나 할 때 6. 15 정상회담 사진을 먼저 보여드리고 시작을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든 사진 있죠? 6. 15의 상징이다시피 한 그것을 제가 조직해서 찍었습니다. 제가 없었으면 그 사진이 나오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그런 일화도 있고 해서 북쪽에서는 상당히 좀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비자를 한 번 받으면 얼마 동안 가 있을 수 있어요?

◆ 진천규> 1회입니다. 단수비자입니다. 갈 때마다 비자를 취재 신청을 해서 비자를 받습니다. 보통 한 보름 정도. 15일 정도로.

◇ 정관용> 더 장기는 안 되고요?

◆ 진천규> 장기까지는 해 본 적 없고요. 제가 최대한 15일 정도. 2주 정도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러면 작년 10월에 한 번 보름 갔다 오시고 또.

◆ 진천규> 11월에. 그렇습니다.

◇ 정관용> 또 신청하시고. 그렇게 여러 차례 계속 신청하신 이유가 뭡니까?

◆ 진천규> 어쨌든 저는 지금 북쪽은 지금 소위 남쪽의 언론이 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대다수. 그래서 저는 받아만 주면 저는 매달. 사실 또 이달에도 8월 중순에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래요? 그냥 수시로 들락거리시는군요.

◆ 진천규> 소위 제 집 드나들 듯이 한다 하는데 어쨌든 그러고 있는 지금 형국입니다.

◇ 정관용> 평양만 가신 거예요?

◆ 진천규> 아닙니다. 원산도 갔다 왔고 남포, 묘향산, 신의주 이렇게 좀 다니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렇게 가시면 옆에 누가 따라붙나요?

◆ 진천규> 물론이죠, 남측이나 북측이나 남쪽에서 북쪽에 올라가도 북측의 안내원이 소위 함께하고요. 북쪽에서 내려와도 당연히 우리의 안내원이 함께하죠. 그것이 남과 북이 똑같습니다.

◇ 정관용> 마음대로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가고 싶은 곳 가고는 못 하잖아요.

◆ 진천규> 그렇지는 않죠. 북쪽 사람이 남쪽에 와도 똑같습니다. 제가 미리 서전 보통 4주 전에 취재신청을 하러 갑니다. 그러면 다 소위 미리 사전 조율을 하죠. 제가 취재신청을 한 것에 의해서.

◇ 정관용> 알겠습니다. 우리 진 기자만이 해 주실 수 있는 얘기가 뭐냐 하면 ‘92년, 2000년에 갔을 때 비해서 요즘 갔더니 뭐가 달라졌더라’가 1번이고요. 두 번째는 작년 10월, 11월은 정말 긴장이 최고조였던 때이고. 금년 예컨대 6월이나 7월은 이건 뭐 남북 정상회담, 심지어 북미 정상회담 다 일어난 후란 말이에요. 그럼 ‘작년하고 올해하고 또 뭐가 달라졌고’ 이 두 가지가 궁금합니다. 먼저 2000년에 비해서 17년 만에 가본 평양 또 북한 전체 어떻게 달라졌던가요?

◆ 진천규> 그래서 제가 단적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요. 일단 자동차가 물리적으로 많아졌다. 자동차가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2000년 당시보다. 그리고 제가 이제 그쪽 분들은 손전화. 우리 휴대폰. 스마트폰, 휴대폰이 상당히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상상을 못했죠, 사실은.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 분들도 그것을 보고 상당히 놀라워하죠.

◇ 정관용> 그리고요?

◆ 진천규> 그런 물리적으로는 그렇고 사실 상당히 위축되고 지난해 10월, 11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그분들 표현으로, 북쪽 분들의 표현으로 지금까지도 기름 한 방울, 나사못 하나 들어오지 못하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최대 제재를 받고 있다고 하고 있고. 10월은 마찬가지였고요. 그때 상당히 위축되거나 좀 긴장되고 물자도 거의 없고, 제재를 받았으니까. 상당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 정관용> 어떤?

◆ 진천규> 그러니까 소위 오히려 활기차다고라기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의 일상적인 모습이었고요.

(사진=진천규 기자 / '타커스' 제공)
◇ 정관용> 그 강력한 제재 속에서도 자동차가 많이 다니고, 손전화도 많고.

◆ 진천규> 마트에도 물건도 꽉꽉 차 있고 그렇습니다. 저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 정관용> 그 얘기면 경제가 좀 잘 굴러간다는 얘기인가요?

◆ 진천규> 그렇죠, 제가 볼 때는 전혀 외부에서 볼 때는 심지어 일본 같은 데서는 조금만 더 제재 압박을 가하면 손들고 나올 텐데 무슨 협상이냐, 일부 이런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북쪽을 몰라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정관용> 평양만 그나마 그렇게..

◆ 진천규> 그런 분들도 많죠, 질문을 그렇게 하는데 원산도 가보고 남포 가보고 오며 가며 자동차로 갑니다. 볼 때 그렇게 곤궁하다거나.

◇ 정관용> 그렇지 않아요?

◆ 진천규> 그렇지 않습니다.

◇ 정관용> 도로 사정은 어떻습니까?

◆ 진천규> 도로 사정은 좀 정상회담 때, 4. 27정상회담 때 김정은 위원장께서 말했듯이 불비합니다. 민망할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철도, 도로가 사실 철도도 제가 1차, 2차 때는 단둥에서 압록강 건너서 신의주, 평양 한 200여 킬로미터를 기차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 정관용> 거기 몇 시간 걸려요?

◆ 진천규> 한 세관 검사 이런 것까지 해서 5시간 정도 걸립니다, 한 200km 정도 되는데. 고속철도로는 거의 1시간 거리인데. 사실 그렇습니다, 현실이.

◇ 정관용> 농촌 지역은 못 가보셨잖아요.

◆ 진천규> 농촌지역도 지나는 가봅니다, 지나는 가고. 사실 제가 들판 같은 데서 내려서 사진도 찍고 취재도 했는데. 농촌 지역도 그런 제가 강연을 많이 다니는데 그런 표현을 하고 그렇게 설명을 드리는데. 우리 대한민국도 서울하고 예를 들어서 지방도시하고 비교 자체가 사실 이건 적절치 않다고 보거든요. 격차가 크죠, 어떠한 이유든 간에. 그런데 마치 우리의 대한민국 서울과 지방도시는 이런 차이는 당연히 하고. 북한만 평양하고 지방하고 다를 거 아니냐? 물론 다르죠. 서울과 지방 도시의 다름.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도시와의 다름인데 그것은 자연시하고 북한만 다르면 이상하다고 보는 거예요.

◇ 정관용> 평양에는 고층 빌딩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늘어났다면서요?

◆ 진천규> 네, 최근에 늘어났다고 하죠. 여명거리라든지.

◇ 정관용> 직접 가보셨습니까?

◆ 진천규> 물론 가봤습니다. 가보고 안에 들어가서 살림집 아파트입니다.

◇ 정관용> 73층짜리 아파트?

◆ 진천규> 취재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사실 동영상도 일부 많이 있고.

◇ 정관용> 아파트 내부 구조는 어떻든가요?

◆ 진천규> 그러니까 그분들은 평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몇 평이냐가 주된 질문인데 그분들은 평의 개념이 없어요. 평이란 돈의 가치거든요. 몇 평에 얼마, 평당 얼마다. 그런데 방의 칸수로 이야기를 합니다.

◇ 정관용> 몇 칸짜리 집이냐?

◆ 진천규> 방이 2칸이냐, 3칸이냐, 4칸이냐. 5칸까지 있습니다, 넓은 집은. 그분들은 소위 특권층이나 넓은 데 사느냐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 정관용> 그럼 누가 살아요?

◆ 진천규> 부모 모시고 자식이 있으면 식구 수대로 방을 배정합니다. 식구 수대로. 부모님 계시면 아무래도 방이 또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자식이 없이 아무리 당 간부라도 부모 안 모시고 자식이 없다면 방 2칸짜리입니다.

◇ 정관용> 73층짜리 아파트가 아마도 북한에서는 제일 높은 아파트일 것 같은데.

◆ 진천규> 그렇게 보여집니다.

◇ 정관용>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당 간부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 진천규> 그러니까 제가 이제 물어봤어요, 저도 상당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후배 기자들도 한번 취재해 보라 했는데. 세 부류가 있다고 해요, 여명거리에 들어가 있는 분들은. 가장 첫 번째 부류가 바로 길 건너가 김일성종합대학교가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서울대학교보다 더 크죠. 학생도 직원도 많고. 김일성종합대학교에 근무하는 교원들이 제일 많이 배정을 받았다. 4800세대라고 그럽니다. 그중에 2000세대든 어쨌든. 그리고 두 번째가 건설하는 데 건설노동자들이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건설노동자들이 두 번째로 배정을 받았다.

◇ 정관용> 그 아파트를 지은 건설노동자가?

◆ 진천규> 그럼요.

◇ 정관용> 이건 정말 우리나라랑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군요.

◆ 진천규> 저는 세 번째 이야기를 듣고 저는 더 놀랐습니다.

◇ 정관용> 뭐요, 뭐요?

◆ 진천규> 세 번째가 누구실 것 같습니까?

◇ 정관용> 모르겠어요. 감이 안 옵니다.

(사진=진천규 기자 / '타커스' 제공)
◆ 진천규> 그러니까 그 안내원 이야기가 진 선생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 여명거리가 70층, 고층빌딩이 멋있게 서 있지만 그 이전에는 또 오래된 아파트도 있었고 상점도 있었고 ‘철거 맞았다’는 표현을 하더라고요.

◇ 정관용> 원주민들?

◆ 진천규> 원주민 맞습니다. 철거민들은 철거 맞은 사람들은 100% 배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 정관용> 그래요?

◆ 진천규> 그래서 지방에 강연 다니면 사람들이 모두가 놀랐습니다. 우리 진행자분께서도 놀랍지 않습니까? 저도 놀랐습니다, 놀란 표시는 안 했지만.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하고 사회주의의 차이가 아닌가.

◇ 정관용> 그렇군요.

◆ 진천규> 어디가 좋다 나쁘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마는.

◇ 정관용> 고층으로 재개발하기 전 원주민들.

◆ 진천규> 100% 배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 정관용> 그 원주민들 100% 초고층 호화 아파트에 입주시키고.

◆ 진천규> 그렇죠.

◇ 정관용> 그 건물 짓느라 고생한 건설노동자도.

◆ 진천규> 건설노동자도 일부 있고.

◇ 정관용> 입주시키고. 그리고 그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 진천규> 김일성종합대학교의 교원들.

◇ 정관용>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 우선 배정하고.

◆ 진천규> 그렇습니다.

◇ 정관용> 당에서 제일 높은 사람부터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군요.

◆ 진천규>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정관용> 그리고 취재하고 다니시면서 에피소드 같은 거 소개해 주실 거 없으세요?

◆ 진천규> 제가 이제 책에도 소개를 했고 강연다니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이제 어린아이들부터, 제가 이제 여중생한테 여중생이 지나다니면 저는 사진기자 출신이니까 본능적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한데 자기들 사진을 왜 찍느냐고. 당당하게 와서 그냥 항의를 하는 거예요. 왜 허락 없이 찍었냐.

◇ 정관용> 그렇죠, 허락받아야죠.

◆ 진천규> 당연합니다. 우리 남쪽에서 서울에서 지하철에서나 이렇게 여중생들 특히 사진 찍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겁니다.

◇ 정관용> 요새는 잡혀가요.

◆ 진천규> 경찰에 잡혀가죠. 그런데 저도 안일했던 것이죠. 북쪽에서도 그랬습니다. 평양에서도. 그래서 저는 상당히 학생들의 당돌함이랄까, 좀 자기주장을 하는 그걸 긍정적인 측면에서 썼는데. 어쨌든 그렇게 안내원의 얘기에 따르면 ‘이래서 제 안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 선생 혼자 다녔다면 큰 봉변을 당합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가 좀 슬픈 현실이기는 한데 남쪽 기자들에 대한 불신이 아이들까지 심어져 있다는 거예요. 제가 만약에 진짜 뭐 외형적으로 백인이든 흑인이든 서양 사람이었다면, 외국인이었다면 오히려 그 아이들이 ‘세이 헬로우’ 하면서 손짓을 하면서 밝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남조선 기자다, 어디로 보나. 남쪽 기자들에 대한 불신이 아이들까지한테도 있다는 거예요. 슬픈 자화상입니다.

◇ 정관용> 그렇군요.

◆ 진천규> 그러니까 남쪽 기자들은 애고 어른이고 간에 너무 왜곡해서 보도를 한다. 그래서 남쪽은 남쪽 기자들이 왜곡해서 억울하다는 게 북한 주민들의 일관된 생각입니다.

◇ 정관용> 그런데 우리 언론이 직접 평양이나 북한 현지에 가서 취재하고 이럴 수 있는 기회가 워낙 없기 때문에 사실 우리 언론으로서도 좀 억울한 면도 있어요.

◆ 진천규> 그렇죠. 상호적이라고 보죠. 저는 일방적으로 북측을 대변하는 건 아니고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후에 가시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던가요?

◆ 진천규> 확 달라지기보다도 그 엄혹한 시기에도 사실은 조금 시간이 된다면 제가 얘기를 하는데. 제가 미국에서 이민 가서도 한 10여 년 살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머니가 계셔서 서울에. 1년에 한두 차례 옵니다. 그러면 미국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데 어떻게 위험한 데 왜 가려고 하느냐,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한국을 떠난 곳에서는. 그러나 서울 들어오면 일상생활이거든요. 우리는 그야말로 천하태평, 무슨 전쟁이냐.

◇ 정관용> 평양도 그렇더라?

◆ 진천규> 평양은 오히려 더하더라는 얘기죠.

◇ 정관용> 더하더라?

(사진=진천규 기자 / '타커스' 제공)
◆ 진천규> 제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평양 사람들은 지금 지난 10월이면 트럼프 대통령이 핵전쟁이 일어나도 불사한다, 수백만 명이. 이런 엄혹한 시기에도 평양을 제가 갔는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무섭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제가 서울에 와서 그런 느낌보다 더 일상입니다.

◇ 정관용> 더 평온하더라?

◆ 진천규> 일상입니다, 거기에서 사실 또 놀랐습니다.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다.

◇ 정관용> 거기도 우리보다 훨씬 더 어떤 의미에서는 자주 그런 미국이 침략해 올지 모른다는 식의 그런 거를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귀에 못이 박힌 거군요.

◆ 진천규> 네,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볼 때에도.

◇ 정관용> 그래서 이번에 내신 책 제목을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라고 펴내셨군요.

◆ 진천규> 네. 그래서 저는 단순히 시간 30분 단축된 것도 사실 4. 27 정상회담 때 해서 5월 5일날 북측에서 바꾸지 않았습니까?

◇ 정관용> 원상복구했죠.

◆ 진천규> 원상복구됐는데. 그건 이제 물리적인 시간이고 저는 하여간 서울 사람이나 평양 사람이나 똑같다, 밥 먹고 잠자는 것은.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도. 일과시간에는 직장 가서 일하고 휴일에는 모란봉공원에 가서 가족들하고 놀이도 하고. 고기도 구워 먹고. 제가 본 모습입니다.

◇ 정관용> 똑같더라?

◆ 진천규> 똑같습니다.

◇ 정관용> 출퇴근 시간에 차 붐비고.

◆ 진천규> 차 붐비고 콩나물시루입니다. 지하철, 버스는 똑같습니다.

◇ 정관용> 택시도 많아졌다고요?

◆ 진천규> 택시도 상당히 놀란 모습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심지어 택시도 타봤습니다. 운전기사가 하는 말이 너무 당연한 말인데 저는 사실. 주로 누가 탔느냐 하니까 지하철이나 버스는 정해진 곳밖에 서지 못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희 택시는 손님을 집 앞에까지 골목길까지 모셔다 드립니다, 이런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저는 사실.

◇ 정관용> 그것 때문에 택시 타죠.

◆ 진천규> 그럼요, 똑같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똑같은 거예요. 오히려 저는 놀랐는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만 20년 전, 30년 전에서 이렇게 심지어 어느 방송에서는 마치 꽃제비, 밥풀떼기 주워 먹는 걸 지금도 보도를 하고 있더라고요. 지난 시기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마치 지금도 그런 양 소위 몇몇 탈북자분들 방송하는 거 보면 좀 안타깝습니다.

◇ 정관용> 안타깝죠.

◆ 진천규> 안타깝습니다.

◇ 정관용> 장마당이나 시장 이런 것도 굉장히 많아졌다면서요?

◆ 진천규> 많아졌다고 합니다.

◇ 정관용> 그렇죠? 거기에 물건들도 넘쳐나죠?

◆ 진천규> 물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 정관용> 즉 자본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거죠?

◆ 진천규> 글쎄 그걸 북측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현실적으로 저는 있다고 보고 마트에도 상당히 물건이 많고. 전부 저는 상식적인 질문을 했죠. 지금 북측 사람들 당신네들 말대로 나사못 하나, 기름 한 방울 들어오지 못하는 제재인데. 제가 단순히 최근에만 10월, 11월, 4월, 7월 이렇게 한 8개월 만에 봤으면 더 물자가 줄어들고.

◇ 정관용> 줄어들어야 되는데.

(사진=진천규 기자 / '타커스' 제공)
◆ 진천규> 당연한데 오히려 더 많고 활기차 보인단 말이죠.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하면 평양에 자동차가 다 설 것이고 주유소에 수백미터 줄을 설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 보지 못했고요. 자동차가 오히려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 않은 모습이에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이게 뭐냐, 도대체. 어떻게 자동차가 가는 거냐?

◇ 정관용> 뭐라고 그러던가요?


◆ 진천규> 그러니까 이 사람들 얘기는 우리는 북한은 지난 7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특히 고난의 행군 때는 지극히 어려운 세월을 겪으면서 우리 스스로 외부 지원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전에는 이제 ‘자력갱생’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지금은 자활, 자립경제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하더라고요. 우리는 내부적으로 다 충분히 외부지원 없이도 살 수 있는 길이 돼 있다고 해서 실제로 저도 놀랐습니다.

◇ 정관용> 진천규 기자처럼 가끔 가게 보신 분들보다 현지에 살고 계신 분들이 우리가 과거보다 이렇게 좀 살 만해졌다라고 하는 거는 정말 느끼지 않겠습니까?

◆ 진천규>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 것들이 뿌듯하게 표정에 나오던가요?

◆ 진천규> 그러니까 표정에 곤궁한 모습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볼 때는. 아무리 좀 봐도 위축되거나. 제가 심지어 활기차 보이기까지 하다, 이런 표현을 제가 썼는데.

◇ 정관용> 제대로 현실을 보고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 진천규> 그렇죠, 저도 그렇습니다.

◇ 정관용> 이번에 책 말미에 보니까 내 꿈은 오직 하나,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출발점에 문화적 통일이 있다고 믿는다. 이 목표를 위해 나는 통일TV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써놓으셨어요.

◆ 진천규> 맞습니다.

◇ 정관용> 통일TV가 뭡니까?

◆ 진천규>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는 케이블방송 채널이 제가 보니까 디지털까지 해서 한 400여 개의 태널이 가용하다 그럽니다. 실제로 200~300개 채널이 있고, 제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수백 개의 채널 중에 골프채널 심지어는 축구채널 또 국가리그별로 심지어 요즘에는 반려견에서 강아지가 집에 있으면 심심하다고 강아지 보는 채널까지 생겨서 저도 봤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 대한민국의 400여 개 채널에 통일을 하자고 하는 반쪽 북녘을 제대로 알자고 하는 이 채널이 단 한 개가 없습니다.

◇ 정관용> 그러네요.

◆ 진천규> 저도 사실 부끄러움을 느꼈고. 우리 모든 분들이 참 이게 책임을 느껴야 된다고 봅니다. 저라도 하자. 그래서 제가 케이블방송에 북쪽 전문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정관용> 그런데 콘텐츠가 없잖아요.

◆ 진천규> 그래서 제가 콘텐츠를 구하려 제가 지난 10월부터 사실은 방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실 8월에 또 가게 되는데 그때는 계약서를 받아옵니다. 콘텐츠 제공을 하기 위한. 지난 8개월 동안에, 10개월 동안에 협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도하고 책을 낸 것은 저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한 것이고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부디 좀 빨리 통일TV가 만들어져서 북측이 제공하는 그 많은 콘텐츠를 저희도 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진천규> 그러기를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진천규> 감사합니다.

◇ 정관용> 진천규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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