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 개봉 3일 차였던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김지운 감독을 만났다. '밀정'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그의 신작은 여러모로 주목할 요소가 많았다. '공각기동대'로 국내에도 팬이 많은 오시이 마모루의 동명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국형 SF에 도전한 것만으로 기대작으로 꼽혔고, 강동원·한효주·정우성·김무열·한예리·최민호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관심을 모았다.
무엇보다 애니메이션에서 가능했던 '강화복 입은 전사들'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화면에 어느 정도까지 나타날지, 속한 집단에 충성해 온 주인공이 개인의 인간성을 찾기 위해 하는 고민이 얼마나 잘 표현될지 등이 개봉 전 관객들이 특히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언론 시사회 때 처음으로 베일을 벗은 '인랑'에 관한 평가는 꽤 갈린다.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화면과 눈 뗄 수 없는 액션은 호평받고 있으나, 이야기의 탄탄함이 부족해 연결이 고르지 않다는 지적도 많이 나온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질문하지 않아도, 김 감독 역시 '인랑'을 둘러싸고 나오는 관객 반응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이 영화가 시도해 이뤄낸 부분이 좀 더 조명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인랑' 개봉 3일 차를 맞았다. 영화 홍보에 바쁘실 것 같다.
계속 인터뷰가 있다. 지금 뭐, 일단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장단점이 뚜렷한 영화라는 생각은 저도 한다. 그래도 그 장점 중에서 성취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 부분들을 (관객이) 좋게 봐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첫 주차를 보내고 있다.
▶ 언론 시사회 때 처음으로 영화가 공개됐다. 생각했던 만큼 만족스럽게 나왔나.
제가 이것('인랑')을 하려고 했을 때, 무언가 구현해 보겠다, 성취해 보겠다는 부분이 있었다. 배트맨 시리즈라든가 로보캅, 최근엔 아이언 맨 같은 강화복 수트를 입은, 어두운 캐릭터가 나오는 박력 있는 액션 영화가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했다. '인랑'이라는 특기대 내에 강화복을 입히는 것이었다.
주제를 전달할 때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이 있는데, 메인플롯은 시스템과 개인에 관한 것이었다. 집단화된 상태에서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말로 자각하는 과정을 그리려고 했다. 그 주제를 운송하는 수단으로서 서브플롯이 있는데, 이건 멜로 라인이었다.
특기대의 인랑, 임중경(강동원 분)과 가장 비슷한 부류의 정체성은 누구일까. 근현대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5.18 때 양민 학살했던 공수부대,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했던 백골단 등이었다. 그 사람들이 그러한 비인간적인, 부당한 명령을 받아 수행하고 있을 때 이들은 어떤 내상을 입었을까. 어떻게 치유할 수 있고, 누가 (이들을) 구원할 것인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그걸 임중경이란 캐릭터에 옮겨놓은 거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가 영화에 나오는 멜로 라인이었던 것이다.
임중경과 인물들이 막혀 있는 벽을 뚫고 나가는 이야기다. 지하수로도 다 벽들이 막고 있고, 남산타워도 유리 벽에 갇혀 있다. 마지막에 장진태와의 액션도 벽을 뚫는 액션이 많다. 최후에는 극복해서 막혔던 철로가 뚫리고 막혔던 남북 정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나. 뭔가 가둬놓은 것에서 뚫고 나가는 것, 집단과 시스템이 가둬놓은 벽의 느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 '인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역시 보는 재미가 있는 액션씬이었다. 찍을 때 가장 고려한 부분이 있다면.
강화복을 입은 특기대의 화력이 가공스러울(보기에 두려움을 줄) 만한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 존재에 대한 아우라, 위압적인 느낌을 영화 안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남산 액션씬은 특수 강화복을 입은 게 아닌 자연인 임중경의 액션이었다. 강화복을 입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몸짓을 가볍게 했다. 강동원 씨는 이런 부분을 아주, 무척 잘 표현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다른 배우들보다 강동원 씨의 액션이 되게 수려하다. 다른 배우들의 액션이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라면 강동원 씨의 액션은 수려하고 부드럽고 약간은 서늘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그게 좀 슬픈 정조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남산 액션도 강동원 씨 특유의 분위기가 나왔다. 그런 상태에서 마지막 수로 액션은 강화복으로 둘러싸여 있고, 완전 무장된 상태로 적들과 마저 싸운다. 이때 임중경이 가진 내면의 아픔과 슬픔 때문에 그 자체가 고독하고 외로운 전투처럼 보이도록 했다. 처음에는 상대할 수 없는 위력을 갖고 있어도, 비애감의 정조를 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게 나온 장면은 무엇인가.
강화복을 입고 나왔던 것들. 액션으로 따지면 남산 액션과 카 체이싱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표현됐다.
남산 전망대를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 그런데 강동원 씨가 키가 크지 않나. 액션씬에서 점프를 해야 하는 게 있는데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적이 있다. 너무 세게 날아와서 화상을 입었다. 수로 액션할 때는 거기서 물 위를 뛰어다녀야 하니까 저를 포함해 모든 스태프가 장화를 신고 있다. 모니터를 보다가 뭐가 급하게 떠오르는 게 있어서 수로에 빠진 적이 있다. 장화도 신지 않은 채. (웃음) 장화가 답답하니까 벗었다가 신었다가 하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물에 빠진 적이 있다. 별로 깊은 곳은 아니었다. (웃음)
▶ 원작자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특히 지하수로 장면을 극찬했다. 어떤 점을 신경 썼나.
신경 쓴 건 특별히 없다. 다만 영화 '인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하고 클라이막스로 끝나는 부분이기도 한데, 우선은 완벽하게 재현하는 게 목표였다. 원작을 본 사람한테는 실사로 이걸 구현했단 말야? 하는 놀라움을 줄 만큼 완벽한 수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직선으로 긴 공간과 작게 갈라지는 미로 같은 공간을 디자인했고, 커브가 휘어지는 것도 주효했다. 쭉 뻗은 길이 아니라서 끝이 안 보이지 않나. 곡선을 그리면서 점점 나아갈 때 저쪽에서 무언가 나올 수 있다는 서스펜스를 주기 위해 디자인했다. 긴 공간이 필요한 스튜디오와 천장이 높은 스튜디오가 필요해서 한 곳에 다 못 만들고 나눠서 하기도 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좀 더 길고 넓고 레이어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스튜디오 자체가 크기도 했지만, (실제보다) 더 큰 공간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인물이) 지나갔던 데를 또 지나가게 할 순 없어서.
▶ 영화 속 배경이 2029년의 한국이다. 통일 이슈가 전면에 나오는데 부담은 없었나.
근미래로 한 것은 부담을 피해 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형상화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근현대사에서 지나왔던 대립각을 드라마틱하게 옮겨왔다. (통일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것이고,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이니 큰 부담은 없었다.
▶ 처음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영화화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와 현재는 남북을 비롯해 동북아 정세가 많이 달라졌다.
처음 통일 이슈를 갖고 들어왔을 때가 전 정부(박근혜 정부) 때였다. 이게 그때 쓴 거다. 정말 공상과학 영화라고 할 만큼, 되게 그 이슈(통일) 자체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던 거였다. 영화 찍고 편집하고 있는데 남북 두 정상이 만나서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북한 지도자는 최초로 미국 지도자랑 만나더라. (웃음) '아, 현실이 훨씬 더 SF적이구나. 따라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기무사 계엄령 건도 그렇다. '인랑'에서 하려던 것과 똑같은 것이지 않나. 그 시나리오가 딱딱 들어맞는 걸 보고 되게 신기해하기도 했다.
▶ '인랑'에서는 특기대와 공안부의 대립과 갈등이 중점적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한 이유는.
거꾸로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인랑'을 영화화한다면 시점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SF니까 대체 역사보다는 근미래를 설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근미래로 한다면 혼란을 야기하려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징후나 이슈를 가지고 그중 선별해야 할 텐데 뭐가 있을까. 실업률도 있을 테고, 출산율, 자살률, 통일도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슈 중에서 원작의 암투를 가져올 수 있는 게 통일 이슈였다. 통일 이슈가 왜 필요한 걸까. 분단이 고착화된 상태에서 힘을 발휘하는 권력기관이 있다. 그런데 통일 얘기가 나오면서 힘의 서열에서 뒤로 밀리는 것이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공안부가 분단이 굳어진 구조를 더 바랐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리스크가 많은 상황을 계속 스캔들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위치와 지위를 놓기 싫어하는, 권력의 핵심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한 일을 한 것이다.
▶ 원작과 달리 인간병기로 기능했던 임중경의 고뇌가 충분히 그려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관객들이 받아들일 만한 러닝타임을 지키려면 다 집어넣을 수는 없다. 영화 리듬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한에서 결정적인 것들만 남겨둬야 했다. 걷어낸 부분에 대해 조금은 아쉬울 수 있다고 본다. 아무래도 변명 같이 들릴 수 있는데, 여름 개봉에 맞춰 짧은 기간에 후반 작업을 해야 했다. 영화를 조금 더 차분히, 충분히 들여다볼 수 없는 시간의 제약이 있었다. 그것도 물론 감독의 역량이다. 시간 내에 제가 해야 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저는 주제를 드러내는 장치를 충분히 줬다고 생각했다. 저만 확신한 것이 아니라 내부 시사, 관계자 시사 등에서 계속 의견을 청취하고 취합해 현재 상태가 된 것이다. 저는 일단 있을 건 다 있다고 판단했던 거다. <계속>
(노컷 인터뷰 ② 강동원부터 최민호까지, 감독이 밝힌 '인랑' 캐스팅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