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0페이지인데, 한 장 한 장의 내용이 '아전인수(我田引水·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꾀함)'라 보는 이의 눈시울이 쉬 붉어지고 있습니다.
요약해보면, 구구절절 '재판의 공정함'을 호소하고 있고, 틈만 나면 '상고법원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법원행정처가 하도 애절한 내용을 늘어놓기에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을 다시 꼼꼼히 복기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건은 지난 5월 25일 법원행정처가 3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목록에만 있던 것이었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는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법원행정처가 비공개했던 것이었는데, 이번에 추가 공개를 통해 내용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문건에 대해 "대법원이 판결 이후의 상황을 논의했을 정도면 그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도 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한명숙 전 총리는 두 가지 사건으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무죄로 끝났고, 한만호 씨로부터 9억원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한 것이 이번 문건에 등장한 재판이었습니다.
1심에선 무죄였는데, 2심에서 유죄가 됐습니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결국 원심이 확정됐습니다.
당시 야당(현 여당)에서는 유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가 양승태 대법원장과 친분이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더 관심있는 분들은 인터넷을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한명숙 전 총리 재판과 관련해 법원행정처가 들고 있는 '재판의 공정성 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문건에서 법원행정처는 한명숙 전 총리의 동생이 1억 원짜리 수표를 전세금으로 사용한 사실과 비서가 거액의 돈을 받은 사실을 거론하며 "법논리를 떠나 국민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다"고 밝혔습니다.
법원이 법논리보다 법감정을 이리도 중시하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또 일부 언론 등이 이번 판결은 '공판중심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과 거리가 멀다고 한 것에 대해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법원칙이기에 국민들에 대한 호소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법원이 바라보는 국민들은 그저 무지몽매한 개돼지에 불과한 겁니까.
한 전 총리는 이번 사건으로 2010년 7월 21일에 기소됐고, 2015년 8월 20일 상고 기각이 됐으니 만 5년이 넘는 시간동안 재판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서는 조속한 재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끌면서 정치인 망신주기 하는 것 아니냐는 곱지않은 시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법원행정처는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이처럼 (한 전 총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늦어진 데에는 '상고사건 폭주에 따른 대법원의 사건 과부하'라는 고질적인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며 "대법원이 이번 사건과 같이 사회적 이목을 끄는 사건들을 신중하고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고심제도를 반드시 개선할 필요가 있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상고법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 겁니다.
끝으로 날짜 얘기 하나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법농단 얘기만 나오면 빠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뭔가 '거래'를 했다는 의혹입니다.
2015년 8월 6일 양승태 대법원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드디어 독대를 합니다. 정확히 2주후 한명숙 전 총리는 상고기각으로 징역 2년이라는 원심이 확정됩니다.
그냥 우연의 일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