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진료기록·범행 상세 묘사… 도 넘은 안희정 공판 보도

김지은 씨 진료 기록 강조한 기사 쏟아져
범행 수법 구체적 묘사, 가해자 입장 대변 보도도 문제
한국기자협회-여성가족부 '피해자 보호', '선정적 보도 지양' 권고

수행비서를 위력으로 성폭행한 혐의 등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 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언론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피해자의 진료 기록을 강조하고, 범행 수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등 선정적 보도 행태를 보였다는 지적이 나왔다.

언론시민단체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이 지난 6일 낸 모니터 보고서는 안희정 전 지사 공판 보도 행태의 문제점으로 △피해자 진료기록 부각 △신체 부위 언급하며 범행 수법 묘사 △가해자 변명 여과 없이 전달 등 3가지를 들었다.

민언련은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주요 방송사, 신문사, 통신사 등에서 내보낸 안 전 지사 공판 보도 전반을 점검했다. 민언련이 첫 번째로 꼽은 문제점은 피해자의 진료기록을 보도에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민언련은 SBS가 [안희정 첫 재판 공방…"덫 놓은 사냥꾼" vs "법적 책임 없어"](7월 2일) 온라인 기사를 통해 '원치 않은 성관계에 의한' 비정상적 출혈이 있었다는 김지은 씨의 진료기록을 처음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종합 기사(7월 2일)에도 같은 내용이 들어갔다.

이데일리는 제목과 소제목에 '원치 않은 성관계'(7월 2일)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고, 중앙일보는 '김지은이 제출한 산부인과 진단서엔'(7월 3일)이란 표현을 썼다. 국민일보는 모든 키워드를 넣어 ["원치 않은 성관계에 의한 출혈" 김지은 산부인과 진단서 들여다보니](7월 3일)라는 제목을 달았다.

월간조선과 조선일보도 각각 '산부인과 진단서 증거로 제출'(7월 3일), '산부인과 진단서 제출한 김지은씨(7월 3일)'라는 내용을 제목에 담았다. 민언련은 "국민일보와 조선일보가 보도 제목에 가해자로 지목된 안희정 전 지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오직 김지은 씨 이름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고 지적했다.

방송사들의 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YTN은 '뉴스통', '뉴스타워'(모두 7월 3일)에서 김지은 씨 진료기록을 언급했고, MBN '뉴스빅5'(7월 3일)는 별도의 자료화면까지 만들었으며, OBS도 '오늘뉴스'(7월 3일)에서 해당 내용을 전했다.

민언련은 "해당 진료기록은 김 씨의 피해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로, 사건과 무관한 자료는 아니"라면서도 "동시에 진료기록은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는 내밀한 정보를 담은 자료이기도 하다. 의료법에는 진료기록 열람 및 사본 발급 요건이 별도로 명시돼 있다. 즉 피해자가 진료기록을 법원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언론이 마치 '허가'라도 받은 그 내용을 앞다퉈 무분별하게 보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고 비판했다.


민언련은 국민일보의 ["목욕할 때도 휴대폰 소지" 김지은씨가 받은 '안희정 보좌 매뉴얼](7월 3일), 동아일보의 ["덫 놓은 사냥꾼" 법정서 안희정 몰아붙인 검찰](7월 3일), 서울신문의 [검찰 "안, 사냥꾼처럼 덫 놓고 위계 악용" 질타] 등이 피해자의 상태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수법을 상세히 묘사했다고 분석했다.

안 전 지사의 공판이 열렸던 지난 2일,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그러면서 "과도한 서술은 피해자에게 사건을 다시 상기시켜 2차 가해를 유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피해자를 범죄 피해자가 아닌 '성적 행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한다"고 꼬집었다.

민언련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을 vs 구도로 나열한 보도와 '학벌', '고학력자', '장애인', '애정관계' 등 안 전 지사 측이 내놓은 주장을 앞세운 보도 또한 문제라고 봤다.

민언련은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일방적 주장을 전면에 부각한 보도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확대 재생산할 위험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안 전 지사 측이 '성폭력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김지은 씨가 '장애인도 아동도 아닌 결단력 있는 고학력 여성'이었다는 점을 부각한 것은 그 자체로 비판받아 마땅한 행태"라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쓰고, 심지어 제목으로까지 부각하는 것은 부적절한 보도 태도"라고 비판했다.

한국기자협회(회장 정규성)와 여성가족부(장관 정현백)는 지난달 8일 '성폭력·성희롱 사건, 이렇게 보도해 주세요!' 책자를 발간해, △잘못된 통념 벗어나기 △피해자 보호 우선 △선정적-자극적 보도 지양 △신중한 보도 △성폭력 예방과 구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등 5가지를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으로 제시했다.

또한 기사를 작성할 때 주의사항으로 10가지를 들었다. 우선 △피해자 등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게 주의할 것 △피해자가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거나 직접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방식보다는 피해자를 보호하기에 적합한 보도방식을 고민할 것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하고 신중하게 보도할 것 △성폭력·성희롱을 근절하기 위해 피해를 유발하는 조직문화와 사회구조, 피해자 보호와 구제 대책, 예방 대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도할 것 등을 권장했다.

피해야 할 태도는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 사생활(습관·기호·질병·장래희망·성적 이력·주변인들의 평가 등) 보도를 삼갈 것 △피해자의 피해 상태를 자세하게 보도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보도를 하지 않을 것 △피해자에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보도를 하지 말 것 △가해자의 가해 행위를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사건 심각성을 희석하는 보도를 하지 말 것 △가해자의 변태적 성향, 절제할 수 없는 성욕 등을 지나치게 강조해 사건 원인이나 범행 동기에 관해 잘못된 통념을 심어주는 보도를 피할 것 △사건 당사자에 대한 잘못된 사회통념을 갖게 하거나 확산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것 등 6가지였다.

한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정무비서였던 김지은 씨를 지난해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모두 4차례 성폭행하고 여러 차례 추행한 혐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강제추행)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은 지난 2일부터 오는 16일까지 7회 열릴 예정이다.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지난 8일 공동 발간한 '성폭력·성희롱 사건, 이렇게 보도해 주세요' 소책자 내용 일부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