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최국 러시아는 '무적함대' 스페인을 상대로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수비 라인에서 버티고 버텼고 또 버텼다. 믿기 힘든 투지와 집중력으로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끌고간 러시아가 스페인을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러시아는 2일 새벽(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끝난 2018 러시아월드컵 스페인과의 16강에서 연장전까지 1대1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아마도 러시아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승부차기까지 가는 시나리오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승부차기에서 두 차례 선방을 펼친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프에 활약해 힘입어 스페인을 침몰시켰다.
스페인은 경기 내내 주도권을 잡았지만 좀처럼 러시아의 빈 틈을 공략하지 못했다. 빈 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점유율에서 스페인에게 26% 대 74%로 밀렸고 스페인의 패스 횟수가 1137회이었던 반면, 러시아는 285회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승부였다.
하지만 스페인이 성공한 필드골은 단 1개도 없었다. '티키타카'로 불리며 점유율을 높이는 스페인 특유의 공격 전술은 러시아의 압도적인 집중력과 활동량 앞에 꽁꽁 묶였다.
스페인이 먼저 앞서갔다. 전반 12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러시아의 세르게이 이그나세비치가 자책골을 넣었다. 이그나세비치는 스페인의 라모스와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졌고 공은 그의 다리를 맞고 굴절돼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5-4-1 포메이션을 앞세워 수비 중심적인 전술을 들고 나온 러시아에게는 뼈아픈 실점이었다.
하지만 후반 41분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코너킥 상황에서 스페인의 라모스가 핸드볼 반칙을 범해 페널티킥이 선언됐다. 조별리그에서 이미 2골을 넣은 아르템 주바가 키커로 나서 스페인의 세계적인 골키퍼 다비드 데헤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었다.
이후 러시아는 후반 45분과 연장전 전후반 30분동안 처절하게 버텼다.
러시아 선수들이 뛴 총 거리는 146km로 스페인보다 약 9km가 많았다. 점유율의 차이가 클 때 일반적으로 수비에 치중하는 팀의 체력 소모가 훨씬 더 크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근육 경련에 쓰러지는 러시아 선수가 늘어났다. 그래도 버텼고 또 버텼다.
경기가 승부차기로 넘어가자 8만명에 가까운 러시아 관중들은 마치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승부차기는 그야말로 5대5 승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러시아에게는 스페인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러시아에도 세계적인 골키퍼 아킨페프가 있었다.
스페인이 먼저 슈팅을 시도한 가운데 양팀의 키커 2명이 차례로 골을 넣었다. 러시아에서는 자책골을 넣은 이그나세비치가 두 번째 키커로 나서 부담감을 이겨내고 데헤아의 벽을 뚫었다.
이후 아킨페프가 스페인의 세번째 키커 조르제 코케의 슛을 막아냈다. 왼쪽 방향의 슈팅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공을 쳐냈다.
러시아는 4번째 키커까지 모두 골을 성공시켰다. 골로빈과 체리세프는 연이어 가운데로 슈팅을 하는 과감한 선택으로 데헤아의 허를 찔렀다. 스페인은 4번째 키커 라모스의 골로 기사회생했다. 5번째 키커 이아고 아스파스의 어깨가 무거웠다.
스페인의 질주는 여기까지였다. 아킨페프는 넘어지는 과정에서 발로 아스파스의 슛을 걷어내 승부를 결정지었다. 러시아는 승부차기에서 4대3으로 이겼다.
이로써 러시아는 구 소련 시절이었던 1970년 이후 48년만에 처음으로 월드컵 8강 무대에 진출했다.
또 1998년 프랑스 대회부터 시작된 개최국의 승부차기 무패행진은 5경기째 이어졌다. 여기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8강전에서 승리한 한국 축구 대표팀도 포함된다. 당시 상대도 스페인이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의 리오 퍼디난드는 경기 후 영국 BBC를 통해 "스페인은 점유율을 장악하는 축구로 오랫동안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제는 스트라이커에게 공을 연결해줘야 하는 때가 왔다. 그들도 변해야 산다. 스페인은 질만 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