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0년이다. '허스토리' 민규동 감독은 10년 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련한 영화를 구상해왔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남태평양에 끌려갔던 '위안부' 여성들의 생환기, 일본군 병사 시점에서 바라본 '위안부' 이야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광복 후 설립된 친일 청산 기구)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은 '위안부' 문제에 비겁한 나라를 비판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이야기.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는 '관부 재판'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현재 대중에게 잘 알려진 훌륭한 활동가로 계셨던 할머니들은 도쿄 재판을 선택하셨었어요. 김문숙 회장님이 이끌었던 관부 재판은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이 재판은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는데 그 전략이 유효했던 거예요. 시모노세키는 지역적으로 징용당한 이들, 근로 정신대, '위안부' 등이 조선에서 끌려와 흩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 도시의 상징성을 지켜내겠다는 고집이었죠. 결국 3심까지 가서 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재판들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국민적 관심도 없이, 사비로, 자신의 인생 항로를 바꾸면서 재판을 진행했던 그 분의 고집스러움이 영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민규동 감독은 "또 '위안부 영화냐"라는 일각의 반응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부채 의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역사적 중요도에 비해 '위안부' 소재 영화들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멋진 캐릭터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그걸 '또 나왔냐'고 하지 않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은 핑계고, 사실은 보기 싫은 거죠. 마음 속에 감춰뒀던 부채 의식이 자극을 받아서 미안해지는 겁니다.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영화를 회피하고 싶은 거예요. 사실 99%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닌 그런 삶을 살아가니까요. 그래서 그나마 편하게 보시도록 이야기의 시점을 원고단 단장 문정숙으로 설정했습니다. 평범하고 속물적인 삶을 살아갔던 사람이 작은 양심이 흔들릴 때 어떻게 성장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죠."
"영화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는 진정한 승리란 무엇인가, 다른 하나는 진정한 연대가 무엇인가. 처음 문정숙 캐릭터는 돈으로 보상 받으면 상처가 치유되리라 생각하지만, 곧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재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승리만 하면 할머니들의 마음이 치유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연대는 결국 입장이 같아지는 것이거든요. 시혜적인 입장에서 지식과 돈, 권력을 베풀기만 하면 내부적인 갈등이 극복이 안되고, 할머니들의 마음과 같은 위치에 서는 순간, 친구가 되고 재판에서 완전히 이기지 못해도 이겼다는 느낌인 거예요. 끝나지 않은 싸움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승리의 개념인거죠. 이런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영화 '아이캔스피크'는 '위안부' 소재를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 많은 관객들을 모았다. 최종적으로 328만 명의 누적관객수를 기록했고, 영화의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나문희는 연말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허스토리'는 '아이캔스피크'와 소재만 같을 뿐,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감독의 연출적 특성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직접적이고, 사실적이며 '위안부' 그 이후 개별 여성들의 삶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조명한다.
"직진하고 싶었고, 불필요한 이미지를 없앤 상태에서 집중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실 한 명의 할머니 캐릭터에 모든 서사를 넣고 그 시점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감정적 폭발력은 강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다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넣었어요. 실제로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가 뭐가 다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냥 다 같이 깔대기 안에 넣어버리고 들춰 보고 싶지 않은 거죠. '위안부' 할머니하면 고정된 이미지도 있어요. 그 분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지만, 단지 살기 위해 애썼을 뿐입니다. 살아남은 게 전부인 겁니다. 할머니들에 대해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중요한 순간인거죠. 개별 여성으로 그 분들을 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다른 아픔들이 보여요. 여러 할머니들의 등장이 제게는 입체감의 확장이라는 지점에서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흔히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야기할 때 '꽃다운 처녀'라고 부릅니다. 처녀가 짓밟혀야 더 분노하는 건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잘못된 발상이에요. 정절은 중요한 게 아니죠. 그들이 노예상태에서 인권유린을 당한 게 포인트입니다. 일본에서 '위안부'에 반박하는 논리가 '자발적 매춘'이었다는 겁니다. 그들 주장처럼 '위안부'는 군표를 받았죠. 그렇지만 자발적이었다고 해도 착취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그들이 노예 상태로 산 것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부정하고 숨기는 방식으로 명목상의 승리를 얻어내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다양한 역사의 이면을 인정하지 않고, 선동과 홍보, 싸움에 필요한 면만 편의적으로 선택한다면 상대방의 논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피해자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야만 그 주장이 올바른 걸까요? 그렇게 볼 수 없죠. 만약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균열을 내느냐고 질문한다면 전 그게 성공한 것이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