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파괴한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은 촛불을 들어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촛불이 타오르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나온 말이 '정상화'라는 것은, 구석구석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국 사회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언론 역시 정상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주체였다. 보수 정권 9년간 통제와 회유의 대상이었던 방송사가 그 중심에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권이 바뀌고, 사장이 바뀌었다. 많은 인사이동이 있었고, 그로 인해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상화를 과제로 내건 방송사들은 확실히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관점을 가지고 방송한다. 특히 시사·보도 영역이 그렇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나중으로 미루거나 놓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21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창립 20주년 기념 토론회 '촛불, 언론운동의 방향을 틀다 : 방송 정상화 논의에서 빠진 것들'을 열었다. 공정성과 신뢰성이라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부분만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로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언론연대는 빠져 있는 것을 불러냈다. 바로 노동, 인권, 여성이다.
◇ 보도와 시사 프로에서만, 그마저도 '사건'으로 존재하는 노동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활동가이자 방송계갑질119의 스태프인 김혜진 위원은 방송에서 노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도하고, MBC가 노동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는 있지만 △전형적 보도 △현상에 치중한 기계적 균형 보도 △일부 프로그램에서만 나타나는 한계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노동 문제를 다룰 때 나타나는 전형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해자 혹은 약자의 이미지다. 재판 거래 의혹이 나오면서 최근 재조명된 KTX 해고 승무원들은 방송 안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된다. 사망한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고, 법정에서 울분을 토하는 식이다.
김 위원은 "바로 그 승무원들이 지난 12년간 투쟁 현장을 지켰고, 투쟁 방향을 논의하고 실행했으며, 자신들이 아니라 승객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는 점은 부각되지 않는다"고 평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을 비정규직 당사자가 아닌 소위 전문가에게 묻는 것은, 비정규직을 피해자로만 바라볼 뿐 보편성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 "방송인들이 제대로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묻고 검증해야 하는지,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공평하게 다룬다'는 핑계로 정보만 나열될 뿐 확증편향을 굳히는 데에만 기여할 뿐"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김 위원은 노동이 '사건'으로서만, 제한된 공간에서 이야기되는 것도 문제라고 봤다. 고공 농성, 파업 등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있을 때만 공론화된다는 지적이다. 또한, 시사·보도 프로그램뿐 아니라 드라마, 교양, 예능에서도 노동이 적극적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방송이 내보내는 내용뿐 아니라,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노동 가치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위계적인 노동 환경을 바꾸고, 비정규직을 방송 주체로 인정하며, 더 많은 권한을 지닌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권리의 주체인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기자·제작자들은 노동 의제에 전문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며, 방송사 비정규직을 주체로 인정하면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 사회적 소수자들 재현하고 목소리 담아내야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 활동가는 방송이 인권이란 주제를 어떻게 소홀히 대하고 있는지를 짚었다. 그는 "주요한 인권 의제지만 방송에서 다루지 않는 것에 얘기하려고 한다. 말해지지 않고 감춰져 있는 것에서, 그 사회의 구체적인 인권 현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명숙 활동가는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언론 보도가 피해자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을 다시는 반복해선 안 된다. 이는 언론인과 방송사의 단순 실수가 아니라 이른바 공론의 장을 흩뜨려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공론이 왜곡될 때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명숙 활동가는 '전참시' 사례를 꼽으며 "인권의식의 부재는 제작진 모두에게 있는 것 아닌가. 생명과 존엄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면 이런 일들이 과연 만들어졌을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방송사 언론인들도 인권교육을 받아야 한다. 혐오가 확산되는 공간에 언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주체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숙 활동가는 '개혁을 더 밀어붙이는 언론 보도'를 요구했다. 그는 "정부가 적당히 개혁하려는 것처럼 언론도 적당한 선에서 보도하고 있지 않나 해서 아쉽다. 국가보안법, 차별금지법, 성소수자 혐오 문제를 인권에 기반해 다룰 때 '방송 정상화'가 이뤄지는 거라고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고 전했다.
◇ 과대 대표되는 남성, 언제나 설 자리 부족한 여성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윤정주 소장은 방송의 '성평등 구현'이 멀어 보이는 이유로 구조적 문제를 들었다. 대부분 고위직을 남성이 차지하고 있어, 성평등한 문화나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다는 게 첫 번째다. 여성은 결혼할 경우 장기근속을 하거나 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성평등한 조직문화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조직의 구조와 분위기는 자연히 프로그램에도 반영된다. 작년부터 '바디 액츄얼리', '뜨거운 사이다', '까칠남녀'가 생겨나긴 했으나 젠더 관점이 들어간 프로그램은 이게 다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수가 적다. 전체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도 안 되는 수준이다.
드라마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 '청춘시대', '마녀의 법정', '미스티', '미스 함무라비' 등 여성이 중심이 된 작품이 꾸준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소장은 "'마녀의 법정'은 여성가족부 지원작이었다. 외부의 돈이 들어와야 (방송사에서) 만드는 게 굉장히 문제라고 본다"고 꼬집었다.
윤 소장은 최근 시작한 오락 프로그램 SBS '집사부일체', KBS2 '거기가 어딘데??', KBS2 '1%의 우정' 등이 모두 남성 출연자로만 구성됐다며 "남성 중심의 오락 프로그램이 가능한 이유는 남성 특유의 봐주기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남성은 (잘) 될 때까지 봐주고 키워주지만, 여성은 한 번의 평가로 출연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성 PD 사단이 있지 않나. 프로그램의 시너지를 높일 수도 있지만, 범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PD 사단을 통해 출연자로 복귀하기도 한다. 제 식구 감싸기"라고 바라봤다.
윤 소장은 무엇보다 '여성 관련 주제'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문화를 비판했다. 그는 "여성 문제가 거의 다뤄지지 않고, 간혹 다뤄질 때도 사내의 전폭적 지원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인적 관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만들어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윤 소장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평등한 조직문화 구축(여성이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 필수, 여성이 다수 참여하는 의사결정 구조, 사내 성평등위원회 설치 등) △출연자 균형성 맞추기(모든 프로그램에서 의식적으로라도 한 성별이 60% 넘지 않도록 하고 새로운 출연자 발굴하려고 노력)가 필요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