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공간을 장악하는 '해방감' 가득했던 여성영화제

[노컷 인터뷰]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②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선아 집행위원장 (사진=황진환 기자)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지자체가 후원하는 문화예술 행사에서 지켜져야 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로 얘기되는 태도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지원을 이유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지원조차도 인색한 경우가 있으니.

지난 7일 폐막한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Seoul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도 예산 압박 때문에 꽤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불과 1년 전 19회 때만 해도 삭감된 예산으로 버텨내야 했다. 어떤 사람에게 예산 지원 권한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영화제 자체가 들썩이는 건 고질적 문제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은 '안정적인 영화제 개최'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20년이나 온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녔고, 갈수록 관객이 늘고 만족도도 높은 만큼 매년 자기 증명을 반복하는 현재의 방식이 아닌, 지자체-영화제 간 장기 협약을 아이디어로 내놨다.

(노컷 인터뷰 ① 주류와는 다른 즐거움 주는 수작들, '여성영화제'엔 있었다)

◇ "여성영화제, 지속가능성 증명… 장기 계획 안에서 보장해야"

1997년 첫선을 보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로 20회째를 맞았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버금가는 긴 역사다. 영화제의 특성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충성도 높은 관객들의 지지를 받기에 상승세다. 그러나 서울시와 영진위의 예산 책정에 따라 휘청이는 구조적 취약함은 여전하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묻자 김 위원장은 "그걸 이제 짜야 한다"며 웃었다. 김 위원장은 서울시의 예산 배분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봤다. 지역의 다른 영화제들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서울시는 서울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들을 하나로 묶어서 예산을 집행하기에 돌아오는 예산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한 묶음'에서 '여성영화제'를 분리해내는 게 앞으로의 할 일이다.

김 위원장은 "본격적으로 서울시와 논의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저희는 20년이 됐으니 역사가 어느 정도 증명된 것 아닌가.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거고. ('여성영화제')가 공공 영역에서 시민들에게 중요한 하나의 장이라는 걸 안다면, 장기적인 계획 속에서 어떤 것들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서울시는 매해 공모 방식을 거쳐 영화제 지원 여부와 규모를 정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역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의 두꺼운 서류를 내야 한다. 거기다 보조금은 영화제가 일정 비율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김 위원장은 "매년 이렇게 소모적으로 한다. ('여성영화제'가) 공공재로서 가치가 있다면 매해 끊임없이 자기증명을 요구할 게 아니라 10년 정도 장기 문화 협약 체결 같은 방법을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장기적인 관계 속에서 문화 콘텐츠를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 위원장은 "(영화제를) 확장하고 더 안정적으로 가기 위해서, 진짜 제대로 된 문화 콘텐츠 사업을 벌이기 위해, 영화제라는 이벤트에 뒤따르는 다른 부가 콘텐츠까지 발전시켜야 하는 국면에 놓여있는 것 같다. 그 인프라를 확보하려고 서울시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사업 중 하나인 아카이브 보라 (사진=아카이브 보라 홈페이지 캡처)
물론 지원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영화제도 예산 확보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다. 영화제는 가장 큰 행사이고, 사무국은 평소에 아카이브 보라 등 여러 기금 사업을 진행한다. 아카이브 보라는 그동안 영화제에 상영됐던 작품 중 화제작을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만들어졌다. 기획 상영회도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활성화하려고 하는데, 지금은 대여 요청이 오면 하는 식이라서 수동적이다. 어떻게 보면 온 디맨드(on demand, 수요자가 원하는 물품이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방식)일 수도 있지만, 채널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전통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는 주류와는 되게 다른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 않나. 유통, 배급을 본격화하기 위한 채널과 루트 개발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주력해야 할 부분이고, 이게 잘 돼야 자생성을 확보할 수 있다. 사실 극장을 갖고 있는 상태여야 대여 요청이 와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올해는 시도하지 못했지만 탤런트 캠퍼스도 구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베를린 영화제 등 세계 영화제는 모두 탤런트 캠퍼스를 갖고 있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영화 학교'다. 김 위원장은 "저희도 여성 감독들이 여성 이슈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하고자 한다. 감독, 스태프 양성이 목적인데, 이런 워크샵을 진행해서 영화제를 풍성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탤런트 캠퍼스든 전용 상영관이든 전면적으로 지원이 필요한 거라서 여러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우리 영화제는 지금 어느 정도 (존재 가치가) 입증됐다고 생각한다. 영화제를 떠받치고 있는 굉장히 강한 관객들의 힘이 있다. 그래서 지속 가능하고. 공급이 부족하지 수요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여러 사업을 벌이려고 애쓰고 있고, 이걸 진행할수록 여러 가지 재정 문제가 풀리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전했다.

◇ '새로운 관객'의 탄생

김 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여성영화제'의 믿는 구석으로 '관객들'을 들었다. 이번 '여성영화제'의 가장 큰 성과 역시 잠재돼 있던 관객들이 발견된 것이다. 김 위원장의 표현을 빌리면 "새로운 관객들이 계발되고 발굴됐다".

"새로운 관객들이 굉장히 많이 찾아왔어요. 1만 석에서, 많게는 1만 5천 석 이상 증가했으니까요. 이게 무슨 분위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굉장히 열렬했던 것 같긴 해요. (웃음) 그리고 저희가 19회 때 메가박스에 4개 관 빌려서 할 때도 '사람 많네' 했는데, 6개 관으로 했는데 더 많아졌더라고요. 여성 관객들이 어떤 공간을 장악하는 데서 나오는 해방감이 있달까요. 일주일 동안 ('여성영화제' 하는 공간이) 피난처 같기도 했고요. 어떤, 편하고 안전한 곳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 사무국장은 제가 너무 낙관적이라면서 착시라고 하지만 (웃음) 반응들이나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대단했어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야외 개막식으로 그 문을 열었다.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홍보 영상 캡처)
'여성영화제'를 열광적으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던 관객 덕분에 온라인 예매는 일찌감치 매진되기 일쑤였다. 과거 15% 열어놨던 현장 예매도 올해는 10%만 열었다. 여러모로 올해 '여성영화제'는 어디까지 더 커지고 강력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해 낸 셈이다.

김 위원장은 "우리 주 관객인 20~40대 여성들은 지금의 여성 현실을 영화를 통해 같이 보고, 공감하고, 어떻게 바꿔내야 할 것인지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함께 그런 영화를 본다는 집단적인 경험 자체가 서로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영화제를 향한 애정이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모든 관객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어느새 '여성영화제'의 전통이 됐다. 김 위원장은 "영화가 좋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나"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뭔가 해방감을 느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굉장히 적극적으로 호응을 표현하니까 (영화제)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로 관객 호응이 뛰어났고, 잠재적 관객이 개발된 것은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일 힘을 줬다"고 덧붙였다.

◇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영화를 보면 뭐가 좋을까

여성영화를 통해 영화계 다양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한국 여성 감독의 영화를 세계로 진출하게끔 하며, 여성영화인 네트워크를 확립하는 것. '여성영화제'의 성격이다. 빠뜨릴 수 없는 의의 중 하나가 바로 '여성주의 비평 확장'이다. 여성영화제를 경험한 이들이라면 영화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을 만나게 되고, 이는 비평을 더 풍성하게 해 준다.

영화를 볼 때 여성주의적 관점을 갖게 되는 건 어떤 점에서 좋은지 물었다. 김 위원장은 "제가 비평가 출신이지만 심판관으로 보이고 싶진 않다"면서 답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스크린 안에서 모든 도덕과 윤리, 모든 미학, 모든 가치, 모든 편견과 모든 새로운 관점이 서로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키고 경합해서 나온 이야기. 그게 바로 여성영화라고 봐요. 우리가 기존에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을 스크린에 올렸을 때, 다시 한번 그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게 여성영화가 아닐까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바라보고 감각하고 경험했던, 직관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의심받거나 도전받는 것.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뭐지?' 하고 질문하는 순간이 하나의 모멘트라고 봐요. 다른 경험으로 넘어가는 순간 같아요. 기존 영화 경험과는 달라요. 충격과 낯섦을 준 영화를 계속 갈구하게 만들죠. 로라 막스가 국제 컨퍼런스에서 썼던 용어로는 '정동적인 경험'이에요. 여성영화제에서 엄청나게 응집된 에너지를 경험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일종의 중독처럼."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참가한 여성 영화인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윗줄 왼쪽부터 배우 김아중, 변영주 감독, 이혜경 조직위원장. 아랫줄 왼쪽부터 임순례 감독, 배우 이영진, 김선아 집행위원장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인스타그램)
그런데도 여성영화제에 벽을 느끼고 아직 다가오지 못한 관객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더니, 김 위원장은 안타까웠던 점부터 꺼냈다. 그는 "우리 영화제를 가장 안전한 피난처로 느끼는 게 안타까웠다"면서 "그렇다고 우리 영화제를 365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한 일상을 바로잡아서, 우리 사회가 모두에게 편안한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여성에게 안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즐거운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저희는 남성 관객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여성 관객들은 다른 영화제도 가면서 우리 영화제도 오는데, 남성 관객들은 모든 문화행사를 가면서 유독 '여성영화제'에만 안 온다는 거예요. 남성 관객들도 여성이 뭐에 관심이 있고, 어떤 영화를 보기를 원하는지 알면 좋죠. 더불어 살아야 하니, 여성들이 왜 그렇게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고 눈을 열어야 한다고 봐요. 그럴 때 가장 공통적인 감수성의 지평을 만들 수 있는 게 '여성영화제'이기 때문에, 남녀 모두, 특히 앞으로 살날이 많은 젊은 세대들이 와서 축제의 시간을 같이 엮어나갔으면 해요.

그리고 아까 올해 정말 새로운 관객들을 발견했다고 했잖아요. 저희 영화제에 갈수록 더 많은 젊은 여성 관객이 찾아오고 있는데, 왜 여성들이 우리 영화제를 사랑하는지 같은 세대나 남성들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인정한 후에야 동참할 수 있으니까요. '아, 그래서 여성영화제를 가고 싶어 했구나', '사회적으로 순기능이 있구나' 하면서 ('여성영화제'를) 자기와 연결된 것으로 인식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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