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같이 말했다. 지난 미국과의 불신의 역사를 회고하며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긴 발언으로 해석돼 눈길을 끌었다. 김 위원장의 이같은 발언 뒤에는 북미 간 수십년의 반목의 역사가 존재한다.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마주앉기까지 1948년 이후 70년이 걸렸다. 북미 정상이 손을 마주잡고, 인공기와 성조기가 번갈아 장식된 회담장 모습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생경한 풍경이었다.
과거 북미 간 비핵화 대화가 자주 어그러졌던 것은 그 기저에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년동안 불신에 발목잡혀 새로운 시도를 해보지 못한 채 '실패의 관성'을 반복해 따라갔다. 비핵화 논의의 역사는 곧 불신의 역사였던 셈이다.
지난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평양에서 만났다. 당시 북한 비핵화와 북미정상회담이 논의됐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김일성 주석의 죽음으로 정상회담 추진은 무산됐다.
북미정상회담은 이후에는 보다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북포용 기조 아래 북미 양국은 2000년 10월 북한 주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는 등 화해무드를 탔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도 10월 23일부터 2박 3일간 평양을 답방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미 정상회담에 관해 논의했다.
하지만 이 역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같은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자 클린턴 대통령은 평양방문계획을 돌연 취소했다.
이후 2001년 9·11테러를 겪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북한은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을 전격 탈퇴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전략적 인내를 내세우며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서 긴장국면이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신뢰 회복을 통해, 곧 향후 CVID를 이루기 위한 토양을 다지기 위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미 국무부 역시 14일(현지시간) 북미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으로 북한을 비핵화하는(CVID) 과정의 시작"이라고 재확인했다.
일부에서 세기의 북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미국이 원했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표현이 공동합의문에 당장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미 간 신뢰회복이란 대전제가 선행하지 않는다면, 설사 CVID란 용어가 공동합의문에 실렸어도 "북한은 언제든 약속을 깰 수 있다"는 불신이 또다시 고개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한 외교소식통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그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패러다임 전환의 획을 그었다"면서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태도를 볼 때 북한은 오히려 비핵화 합의 이행에 대한 상당한 의지와 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고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합의도 이행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양 정상의 의지를 확인하고 단계별 이행 로드맵을 추후 만들어 실천해 나가면 된다"고 덧붙였다.
물론 과제는 남아있다. 앞으로 북한과 미국 사이 본격적인 비핵화 실무회담이 이어질 것이다. 체제안전 보장 방안을 구체적으로 이끌어 내려는 북한과 CVID를 관철하려는 미국이 계속해서 기싸움을 이어나갈 것이고 다소 지난하게 비춰질 수도 있다. 북미정상회담이 한차례 미뤄졌던 것과 같은 '기복'도 또다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북미정상회담이 만족할만한 비핵화 관련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섣불리 평가할 때는 아니다.
신뢰를 계속해서 쌓아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북미정상회담 취소 국면에서 북미 간 다리역할을 했던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도 앞으로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비핵화의 시한을 2년 반으로 잡았다. 지금은 단 한차례 회담의 성패를 평가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최소 2년 반의 시한을 어떻게 채워나갈지를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