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날 싱가포르의 여러 명소들을 관광했다고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김 위원장의 발언도 함께 전했다.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장소를 마련해 준 싱가포르에 대한 일반적인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싱가포르의 독특한 정치·경제사를 볼 때 김 위원장의 발언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밤 '깜짝 싱가포르 관광'에 나섰다. 사상 최초의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일정에 없던 싱가포르 관광에 나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싱가포르의 대표적 관광지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와 마리나 베이 샌즈 건물의 지붕 위에 위치한 스카이 파크, 싱가포르항을 둘러봤다.
김 위원장은 관광 이후 "싱가포르가 듣던 바 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건물마다 특색이 있다"며 "싱가포르의 경제적 잠재력과 발전상을 잘 알게 됐다. 귀국(싱가포르)에 대한 훌륭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는 등 칭찬 일색의 표현을 쏟아냈다.
역사적 담판이 될 북미정상회담 직전 '깜짝 관광'까지 나서면서 싱가포르를 높이 산 이유에 대해 북한이 경제 발전 모델로 싱가포르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체제 질서를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싱가포르야말로 '개성공단의 확대판'으로, 김 위원장이 새롭게 꿈꾸는 경제 모델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물류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기업들이 몰려 있는 경제 강국인 동시에 세습독재라는 비민주적인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례적인 나라다.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가 1965년 독립한 뒤 초대 총리로 취임해 1990년 퇴임할 때가지 장기 집권하면서 '부자 북한'이라고도 불렸다.
리콴유는 경제 개방과 외자 유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장점 수용, 신권위주의 통치 등을 통해 1인당 GDP가 6만 달러를 넘는 경제 발전과 사회 질서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씨 일가가 북한을 통치한다면 싱가포르는 리콴유 일가가 다스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리콴유 집안은 사실상 싱가포르의 정·재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현재 총리도 리콴유의 장남 리셴룽으로, 84년 32세의 나이로 국무장관에 오른 후 요직을 두루 거쳐 2004년 총리직에 올랐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싱가포르는 경제 성장과 사회 통제가 잘 어우러져 있는 나라인 동시에 강소 국가로서 국제화된 이미지까지 갖고 있는 등 북한이 닮고 싶어하는 부분이 상당하다"면서 "싱가포르 한 국가만 참조할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북한에게 매력적인 요소가 많은게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홍 실장은 또 "김 위원장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하고 있는 원산 갈마지구를 벤치마킹 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면서 "이 갈마지구를 싱가포르처럼 선전하고 싶은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2016년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가 쓴 '3층 서기실의 암호'를 보면 2012년 집권 초기 김 위원장은 나름의 개혁·개방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현 경제 시스템으로는 힘들다. 다른 나라들의 경제 시스템을 모두 연구해보자. 좋다는 경제 이론도 다 가져가다 공부해보자"라는 말을 통해서다.
실제로 김 위원장을 만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미국 CNN 인터뷰를 통해 김 위원장의 첫 인상에 대해 "새로운 길을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면서 "김 위원장이 뭔가를 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와 같은 분석에 힘을 실어줬다.
북한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킨 싱가포르를 연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처형된 김 위원장의 고모부 장성택이 2002년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서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과 함께 찾았던 곳이 싱가포르다.
북한은 한국보다도 3년이나 먼저 싱가포르에 통상 대표부를 설치하는 등 싱가포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북한은 1968년 1월 싱가포르에 통상 대표부를 설치했고 69년 12월 통상 대표부를 총영사관으로 승격했으며, 75년 11월에는 싱가포르와 수교 합의에 따라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한 상주 공관을 개설했다.
그러나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본격화하면서 싱가포르와 북한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싱가포르는 2016년 10월 1일부터 북한을 비자 면제 대상에서 제외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 8일부터는 대북 교역을 전면 중단했다.
한편, 꼭 싱가포르 모델이 아니어도 북한의 개혁 개방의 적극적 의지를 과시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 위원장 스스로 싱가포르를 배우겠다고 이야기한 그대로, 북한의 개혁 개방 의지를 국제사회에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본인이 적극적으로 개방형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