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만의 문제일까…수족 노릇한 '판사'들은?

"심의관들, 임종헌 차장 대법관으로 제청될 가능성 크다고 인식"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사법농단 몸통 양승태와 그 관련자 형사고발 기자회견'에서 법원공무원 노조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박종민기자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가 몰고온 후폭풍의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할까.

재판을 통한 청와대와의 거래 시도, 법관 사찰 등의 문서를 생산한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의 총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앞서 조사단의 결론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한 명의 '개인적 일탈'에 무게를 둔 것도 이같은 책임론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라고 하기엔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기꺼이' 부당한 지시의 손발이 된 판사들이 남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을 양 전 대법원장이나 임 전 차장에게 돌리기엔 이들이 작성한 문건들이 너무나 적나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10년차 이상인 판사들은 왜 수족의 역할을 자처했을까. 말단 심의관조차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판사이다. 법원 안팎에서 이유로 드는 것은 역시 인사권, '자리' 문제다.

윗선부터 그 논리에 따라 움직였다는 분석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차기 대법원장 일순위로 거론되면서 '우병우의 카운터파트(임 전 차장 진술)'로 지목될 정도였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경우, 박근혜 정권이 유지됐다면 자연스럽게 대법관에 제청될 분위기였다.


그 아래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행정처 심의관들이 재판거래나 동료사찰에 관련한 문건을 생산한 배경과 관련해 조사단조차 "임종헌 차장이 대법관으로 제청될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심의관들은 인식하였을 것으로 보임"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법원행정처, 더 나아가서 대법원장이 쥔 인사권을 의식한 결과 이들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법부 농단'사태를 빚어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왔다"는 표현은 정다주 울산지법 부장판사로부터 나왔다. 그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 재판과 관련해 법원행정처와 청와대가 의견을 주고 받았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정리했다. 또 전교조 법외노조 재판과 관련해선 "국정 운영의 동반자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는 시점"을 찾고자 했다.

시진국 창원지법 통영지원 부장판사는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구체적 협력 사례"를 정리했다. 그는 특히 2015년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국가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결로 청와대를 설득하자고, '제안'까지 했다. 특조단은 "시 심의관은 임종헌 기조실장에게 긴급조치에 관한 대법 판결을 청와대에 대한 사법부의 구체적 협력 사례로서 상고법원 입법을 위한 설득 방안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해 수긍됐다"고 밝혔다.

김종복 광주지법 목포지원 부장판사는 2015년 통합진보당 지역구 지방의원 의원직을 상실시킬 방안과 관련한 문건을 만들면서, "법원이 개입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감당하기 힘든 파장이 있을 수 있음"이라고 썼다.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단 얘기다.

이에 김 판사는 "연구부서로서 통진당 의원 관련 행정소송상 가정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상정해 쟁점을 검토한 것이고, 반대의견을 분명히 밝혀 받아들여졌다"며 "'외부로 알려질 경우 감당하기 힘든 파장'이라는 부정적 의견도 반대하기 위한 논리였다"고 말했다.

박상언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2014년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 청와대를 도울 방법이 없다면서 "사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사건 처리 방향과 시기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를 얘기했다.

김민수 창원지법 마산지원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에 반대한 판사를 콕 집어 "존경하는 선배, 친한 선·후배 명단을 취합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박상언 창원지법 부장판사 역시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법관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연구회 '중복가입자 정리'를 통해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인권법연구회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 등 연일 언론의 타깃이 되고 있는 윗선과는 달리, 당시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이들은 현직에 대부분 남아 있다.

현직 법관은 징계를 하더라도 파면과 해임 등으로 신분을 박탈할 수 없다. 이들이 임관부터 3급 고위공무원으로 시작하고 탄핵의 대상도 아닌 이유는 재판의 독립성을 위해서였다. 가령 재판 거래나 동료 사찰 등 어떤 부당한 지시나 압력이 내려와도 그로부터 자유롭게 '양심에 따라' 일하라는 것이었다.

조사단은 엄정한 징계 방침을 밝힌 상태다. 사찰 피해자이자 형사고발 의사를 밝히기도 한 차성안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3차에 걸친 조사과정에서 명백히 거짓말을 한 판사들이 있는데, 직무상 거짓말까지 하는 사람은 판사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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