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만난 주민경은 여전히 많은 것들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최근 여러 소속사와 미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일이 없어 3년 가까이 쉰 적도 있다. '예쁜 누나'를 만나기 전까지, 지난해는 무척 우울한 시기였다. 당시 스물아홉이었기에, '이게 아홉수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미술을 전공해 프랑스 유학 중이었던 주민경은,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끝끝내 누르지 못했다. 깨져버리더라도 일단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연기를 시작한 후에는, 이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여러 가지 옵션을 걷어내고 이제 정말 '직업 배우' 한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노컷 인터뷰 ① '예쁜 누나' 주민경 울컥하게 한 손예진의 말 한마디)
◇ 주민경이 꼽은 '예쁜 누나'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친누나-친동생 못지않게 가족처럼 지낸 진아(손예진 분)와 준희(정해인 분)가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공감 가는 진아 캐릭터와 로맨스 드라마에서도 단골처럼 등장했던 '폭력성'을 최소화한 부드럽고 무해한 준희 캐릭터 모두 관심의 대상이 됐다. 또, 사랑에 관한 현실적인 묘사가 장점으로 꼽혔다.
극이 진행될수록 진아와 친해져, 가까운 거리에서 둘의 연애를 지켜본 금대리의 반응은 어떨까. 주민경은 "일반적인 남녀가 하는 사랑이랄까. 너무 현실적이었다"며 "다들 그렇게 연애하고 있을 것 같은, 내 옆에서 했던 사랑, 내가 했던 사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주민경이 '예쁜 누나'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좋았다고 꼽은 장면도 현실 연애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한 상황이었다.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이 욕하실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운을 뗀 그는 진아와 준희가 양보하지 않고 싸우는 장면을 들었다.
"진아랑 준희가 싸우는 씬이 너무 좋았어요. 제가 경험해 본 거기도 하고요. (싸우는 게) 말 안 되는 상황이 아니긴 하지만, 분명히 어느 한쪽에서 굽히면 너무 쉽게 풀릴 수 있거든요. 보통 드라마에서는 (그럴 때) 안고 울고 화해하고 끝나잖아요. 그런데 둘 다 굽히지 않잖아요. 진아가 내려와서 택시 기다리면서 혹시 준희가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것이나, 결국 준희와 엇갈리게 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최고였어요."
◇ 부서질 것 각오하고 시작한 연기
원래부터 연기가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주민경은 "계속 나이를 먹다 보면 미련만 남은 상태로 시도도 못 해 볼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나 예전에 연기하려고 했어'라고 말하는 이상한 아줌마가 될 것 같아서" 연기에 도전했고, '유나의 거리'(2014)로 데뷔했다.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상류사회를 동경하는 야망 넘치는 아나운서 역을, '사랑하는 은동아'에서는 불륜 커플 역을 맡았다.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첫 작품에 출연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 후로 '원치 않는' 공백기가 찾아왔다. 3년을 쉬었다. 모아놨던 돈을 썼고, 모자라는 건 하루 벌어 하루 살았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스무 살 때부터 나와 산 주민경은 피아노 학원 강사, 옷가게, 카메라 샵, 스크린 골프장 등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2017년이 제일 우울했다. 29살이었는데 이게 아홉수라는 건가 싶었다. 그때 '나는 왜 항상 이렇게 힘들까' 했다. 5천 원이 없어서 커피를 못 마실 정도였으니까"라고 부연했다.
가장 우울했던 시기에 만난 '예쁜 누나'는 주민경에게 큰 변화를 안겨줬다. "인간은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니까"라는 금보라의 대사는 사실 주민경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는 "제가 손예진 선배님 옆에서 연기하다니, 꿈이라도 꿨겠나"라며 웃음 지었다.
이어, "전 진짜 '연애시대', '아내가 결혼했다' 등 선배님이 나오신 작품 많이 봤거든요. '클래식'도 있고. '아내가 결혼했다' 보면서 '아,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진짜 한 치 앞을 모른다. 아직도 꿈만 같다. (같이 연기한 영상) 클립 보면 분명 제가 저 옆에 있었는데 뭐지? 싶기도 하다. 감독님께도 너무 감사하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예쁜 누나'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민경이라는 이름 세 글자와 얼굴을 알리게 되었지만, 정작 방송 중에는 드라마가 '잘 된다'는 것을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고.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현장 스태프들이 시청률과 화제성 지표를 얘기해 줄 때야 실감이 났다. 패러디가 쏟아지고, '예쁜 누나' OST가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나올 때 비로소 드라마의 인기를 느꼈다. 자신은 극중 이름인 금보라보다 '금대리'로 쳐야 검색에 잡히더라는 일화도 전했다.
◇ "그냥 배우가 너무 좋은" 주민경이 그리는 미래
지금까지는 콤플렉스로 여겼던 '목소리'에 대해서도 다른 평가를 받았다. 전화 받으면 남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그는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요즘은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는 반응을 많이 듣는다. '유나의 거리' 시청자들은 주민경을 '목소리'로 기억하기도 한다고. 요즘 들어 "아, 목소리가 내 큰 장점이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한때 일을 오래 쉬면서 우울한 시기를 보냈지만, 주민경은 배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전혀 후회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어렸을 때, 외부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 선택한 미술과 달리 '연기'는 성인이 되어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 동안 힘들 때 '와, 진짜 힘들다. 내가 왜 이걸 선택했을까' 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나는 배우니까' 이렇게 됐어요. 딱히 뭐가 있어서 '나는 배우가 좋습니다' 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너무 좋아요. 배울 때마다 더 어렵고 더 막 생각도 많이 해야 되고 고심하지만 그것조차도 재밌어요. 한 선배님이 제게 얘기해주셨던 게 '넌 전공자가 아니잖아. 그러니 항상 즐겁게 할 수 있을 거야. (연기 전공은) 이것만 배우고 이것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힘들지만, 넌 즐겁게 할 수 있을 거야'라는 거였어요. 전 이제 배우 한 길만 가는데도 즐겁더라고요. 다양한 옵션을 걷어냈는데도 불구하고요."
주민경은 '예쁜 누나' 후속작인 '스케치'에서 김도진(이동건 분)의 아내 이수영 역으로 짤막하게 출연했다. 상반기를 산뜻하게 출발한 이후, 하반기 계획이 어떤지 묻자 그는 "인간은 정말 한 치 앞을 모르지 않나"라는 대사를 다시 한번 꺼냈다.
주민경은 "서른, 30대를 기분 좋게 시작해서 행복하다. 앞으로 어떤 걸 이루고 말겠다는 건 없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기회와 행복한 시간이 한꺼번에 왔으니,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챙겨 먹을 건 다 챙겨 먹으면서 알뜰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를 너무 풀지도, 옥죄지도 않는 선에서 할 것들을 다 하고 싶다. 욕심 부리는 게 아니라, 저한테 주어지는 것들을 잘 보내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