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코치인 체육(박근록 분)과 비밀 연애를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가장 좋았던 시기는 지나간 모양새다. 설상가상으로 친구 빡큐(김동영 분)가 미행해서 찍은 동영상에는 다른 사람과 모텔에서 나오는 체육의 모습이 찍혀 있다. 단짝 문희(장햇살 분)와 빡큐까지, 셋은 현장을 잡기 위해 애쓴다. 여기까지만 봐도, 순수하고 상냥하고 애교 많은, 흔히 '소녀'에게 붙었던 수식어가 '용순'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우리가 자라는 방법' 기획전으로 영화 '용순'의 인디토크가 열렸다.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가 사회를 맡은 이날 행사에는 신준 감독과 각각 용순, 문희 역을 맡은 배우 이수경과 장햇살이 참석했다.
'용순'은 신 감독의 단편 '용순, 열여덟 번째 여름'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여름 햇살처럼 뜨겁고 강렬한 사춘기를 열여덟 살에 겪은 용순이 극의 중심에 서 있다. 신 감독은 '가장 말 안 들을 나이'라고 생각해 열여덟 살로 설정했다고 운을 뗐다.
그렇다면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여름은 항상 지나고 나서야 그리웠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않나. 사춘기와 잘 맞기도 하지만, 그때(당시)는 다 지나가길 바라는데 그리워할 만한 시절이 아닐까 싶어서 하게 됐다"고 전했다.
미디어에서 흔히 그려지던 소녀의 모습을 배반하는 용순 캐릭터와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관객이 영화 '용순'에 열광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못마땅해하는 지점이다.
아빠가 데려온 새엄마에게, 사랑의 라이벌이라 여기는 영어 선생님(최여진 분)에게 적의를 투명하게 보이고, 가뜩이나 생리를 안 해 불안한데 이 와중에 바람까지 피운 것으로 보이는 체육을 몰아붙이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아직도 저는 악평을 찾아본다. 악평에 싫어요가 한 개 눌려 있으면 그게 바로 저"라고 너스레를 떤 신 감독은 "저는 용순이가 못됐다는 생각을 안 했다. 제 주위에 사춘기를 보냈던 많은 사람들이 용순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저만큼이라도 절제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여고생이 사춘기 시절을 저돌적으로 보내는 모습이 모든 세대의 관객층과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거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서도 "용순이가 저돌적으로 잘 나간 점에는 후회가 없고 그게 영화의 중심점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수경은 최근 '지랄발광 17세'와 '레이디 버드'를 본 일화를 전하며 "왠지 '용순'이 생각나는 영화더라. 두 영화 다 평점이 정말 좋더라. 그래서 조금 부러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면서 "그런 영화들이 더 많이 생겨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랑말랑하고 앙증맞고 애교가 많은 소녀의 상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고 현실적인 모습이 담긴 영화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고정관념이 더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고, '용순'이 그런 발판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용순은 '저돌적'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에 꽤 복잡한 요소를 고루 지닌 캐릭터였다. 이수경은 용순은 "울 때 쪼그려 앉는" 아이로 기억하며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굉장히 생각이 많고, 뛸 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 소심하기도 한 것 같다.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자신감이 없고, 사랑을 받아도 그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는 체육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용순에게 처음으로 무언가 '잘한다'고 말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수경은 "용순이는 어른이랑 대화를 오래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다. 미래 발전적인 이야기를 해 준 남자 어른도 (체육이) 처음일 테니 뭔가 새로울 것이다. 내가 바라던 어른이 있다면 이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된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 감독은 "여고생과 남자 선생님 사이의 썸을 보면 선생님이 거의 동일한 액션을 취한다. 여고생이 외바라기 식으로 바라보면 까칠한 선생님이 되게 냉정하게 자른다. 전 그런 게 좀 불편했다. 선생님은 저렇게 하는데 왜 여학생은 좋아해야 하나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체육을 "반 박자 느린 캐릭터"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소심하고 망설이고 고민하는 친구였으면 좋겠다고 (배우와) 얘기를 나눴다. 가장 큰 불안감을 가진 친구라고도 봤다"며 "이 영화에서 (체육은) 하나하나를 임기응변처럼 해결하기 위해 굉장히 고생하는데, 그로서는 최선이었으면 좋겠단 얘기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이수경 역시 장햇살과 함께 찍은 마지막 시퀀스를 가장 뭉클한 장면으로 꼽았다. 새엄마와 다른 선생님과 학생들, 체육까지 있는 앞에서 영어와 대차게 한 판 하고 코피를 닦고 나오는 장면이, 용순의 애처로움과 안쓰러움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장면이라 생각했다고.
이수경은 극의 마지막 부분을 촬영 초반에 찍어야 해서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면서도 "(장햇살) 언니가 뒤에서 안아줬을 때 느낌이 생각이 나서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장면이 나오면 뭉클한다. 저한테 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영화에 관한 흥미로운 깨알 정보가 속속 나왔다. 충청남도로 배경을 설정한 이유는 "여유로우면서도 까칠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엔딩에서 뒷모습만 나오는 여성은 "걸으면서 지난 일을 훑는 미래의 용순"이고, 엔딩 크레딧에서 극중 인물의 온전한 이름 대신 '아빠', '영어' 이렇게 나온 것은 "스쳐만 가도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영화 끝쯤 홀로 운동장을 달리는 용순이 스톱워치를 멈추자 나타나는 숫자는 20:14 416이었다. 이에 대한 의미가 있는지 묻자 신 감독은 "단편을 쓸 때가 2014년이었고 큰 사고가 있었다. 학생들도 용순도 그때 열여덟이었다"며 "최소한의 애도의 마음은 가지고 가야 한다는 마음에서 넣었다"고 답했다.
개봉한 지 약 1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용순'을 찾아준 것에 감독과 배우들은 고마움을 표했다. 신 감독은 "되게 의미 있고 뜻깊었다"며 "'용순'은 몇 년 뒤에 보면 좀 더 재미있는 영화가 아닐까"라고 끝인사를 전했다.
장햇살은 "몇 번 봐 주시는 분들이 (여기)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 봤다는 분들도 계셔서 감사하다. 저라는 사람이 '용순'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되게 따뜻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수경은 "용순이를 찍고 나서부터 제가 갑자기 뭐가 됐나 보다. 그래서 굉장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책임감 갖고 찍을 걸 하는 마음이 든다"며 "용순이가 1년이 지나서도 이 자리에 있는 건 모두 여러분들 덕이다. 오래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