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극장 안을 데우던 난로의 매캐한 번개탄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동시 상영관에서 철 지난 영화 두세 편을 몰아 보며 하루를 때우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면 학급 전체가 극장을 찾아 단체관람하면서 소란 피우던 기억이 난다"….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별한 문화적 가치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인터뷰로 인연을 맺은 어느 시인의 극장에 관한 매력적인 분석도 문득 떠올랐습니다.
"극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인다는 점에서 광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불이 꺼지는 순간 오롯이 혼자서 영화를 봐야 하는 밀실이 된다. 영화를 본 뒤 사람들은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정보를 공유한다. 그 순간 극장은 다시 광장으로 탈바꿈한다. 광장과 밀실이라는 양 극단의 특징을 함께 지닌 곳이 극장인 셈이다."
그 만남이 있고 몇 주 뒤 멀티플렉스들이 줄줄이 영화값을 1천원씩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리꾼·시민단체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인상은 예정대로 강행됐죠. 곧이어 전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마블 히어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했고, 역대급 관객 동원 기록으로 흥행 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신의 한 수'로 불릴 만한 영화값 인상 타이밍이었죠.
어마어마한 돈을 들인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불거져 온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도 점차 무뎌지는 분위기입니다. 중소 규모 영화들은 아예 큰 영화를 피해 개봉날을 잡고, 그 틈바구니에서 상영관을 아예 잡지 못하는 영화들은 공동체 상영 등 대안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국회에서는 영화산업 독과점 폐해와 다양성 저해를 막겠다며 '대기업의 영화 배급과 상영을 분리한다' '영화 1편에 배정되는 상영관 수를 제한한다'는 식으로 관련 법 개정안을 여러 차례 내놓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입니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안에서 의원들이 관객인 국민들 입장은 뒷전에 둔 탓일까요.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 극장 스크린 수는 모두 2766개입니다. 이 가운데 3대 멀티플렉스로 꼽히는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의 스크린 수는 차례로 1085개, 810개, 650개로 모두 합쳐 2545개입니다. 전체 스크린의 92%를 3대 멀티플렉스가 차지하고 있는 셈이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그린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는, 기계들이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매트릭스라는 가상세계에 심어 둔 요원 스미스(휴고 위빙)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미스는 어느 순간 통제권을 벗어나 매트릭스를 장악하고, 현실의 기계 세상에도 치명적인 위협을 가합니다. 결국 기계들의 절대 권력자는 주인공인 인간 네오(키아누 리브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미스를 제거한 뒤 인간과의 공생을 택합니다.
멀티플렉스들이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전략을 펼치는 것을 두고 뭐라 할 수는 없겠죠. 그것이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사회의 생리라고들 하니까요. 하지만 자본주의에도 분명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나만" 혹은 "우리만 잘 살아보세"보다는 "다 같이 잘 살아봅시다"라는 가치가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받아들여지기 더욱 수월한 법이죠. 그것이 상대적으로 싼 값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문화로서, 영화와 극장이 100년을 훌쩍 넘게 지켜 온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다수 관객들이 원한다"는 철 지난 빈약한 논리로 스크린 독과점을 합리화하고, 과도한 시설 유지보수·임대료 상승분을 영화값 인상으로 관객들에게 전가해 온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의 기존 입장으로는 이러한 상식의 가치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스스로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결국 멀티플렉스의 지속가능성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수익 창출과 더불어 국민들이 문화로서 영화와 극장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돕는 '공생'의 길에, 위기의식 속에서 지속가능성을 찾는 멀티플렉스의 해법이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