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당신의 부탁'(감독 이동은)에 나오는인물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그것도 거의 '엄마'다. 임수정이 맡은 효진은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사별한 남편이 남긴 열여섯의 소년 종욱(윤찬영 분)과 갑자기 함께하게 돼 '뜻밖의 엄마'가 되는 역이었다. 효진의 절친이자 영화에 발랄한 리듬을 부여하는 미란(이상희 분)은 젖먹이 아기를 기르는 초보 엄마다.
미성년 신분으로 아이를 가진 주미(서신애 분)나 주미의 아이를 키우기로 한 서영(서정연 분), 어릴 적 종욱과 같이 살았던 연화(김선영 분),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자꾸만 티격태격하는 효진 모 명자(오미연 분)까지, 조금씩 모양과 농도는 다르지만 '엄마'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영화를 가득 채운다. 영화 영문 제목이 '마더스'(Mothers)이니, 더 말이 필요할까.
'당신의 부탁'은 임수정이 데뷔 후 처음으로 엄마 역을 맡은 작품이다. 대통령 아버지를 두어 조금 엇나가는 딸('피아노 치는 대통령')이거나, 계모를 향한 증오, 아버지를 향한 원망, 가볍지 않은 자매애 모두를 가져갔던 미스터리한 소녀('장화, 홍련')이자, 숱한 작품('ING', '행복', '김종욱 찾기' 등)에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에게 '당신의 부탁'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여성 배우가 '엄마' 혹은 '아줌마'(로 대표되는 기혼 여성)라는 역할을 맡는 것을 영역의 '확장'이라고 반갑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남성 캐릭터는 40대가 되어서도 극의 중심에서 다양한 직업인이나 로맨스의 대상으로 그려지지만, 같은 나잇대의 여성 캐릭터는 세부 사항만 살짝 바꾼 전형적인 엄마나 아줌마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 변화는 보통 '기회의 축소'로 읽혔다.
그래서 궁금했다. 임수정이 왜 '당신의 부탁'을 택했는지. 언론 시사회 당시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결이 너무 좋았"고 "다양한 형태의 엄마가 나오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던 임수정은, 지난 12일 서울 중구 명동 CGV 라이브러리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좋은 점'을 다시 한번 밝혔다.
◇ 다양한 여성이 나오는 '귀한 영화'라 선택
임수정은 '당신의 부탁'이 좋은 작품으로 완성돼 나온 자체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임수정이 보기에 이 작품은 '따뜻한 영화'다. 개봉은 4월에 하지만 곧 오는 가정의 달(5월)을 맞아 보기에 적합한. 보고 있으면 괜히 엄마가 생각나고, 가족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엄마 손 붙들고 와도, 친구들끼리 와도 좋은 영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영화 속의 여러 엄마들이 나오고, 그런 엄마들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점도 좋았다. 그는 "이렇게 많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가 너무 사실 귀하지 않나.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 여성 관객이 더 공감하시는 것 같더라. 여성 기자분들이 더 질문하시고, 작품 좋았다는 말도 자주 하셨다"며 웃었다.
사실 빠듯한 일정이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후로 13년 만에 찍은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가 끝나자마자 '당신의 부탁' 출연을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 여름에 만들 때부터 사실 빨리 선보이고 싶었다"며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도 관객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빨리 보이고 싶었고, 저도 만족하는 작품이 돼서 관객분들을 빨리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첫 엄마 역할인 데다, 열여섯 살의 소년을 아들로 맞는 경험을 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잘 표현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배우 임수정과 엄마 역할을 바로 연결하지 않는 상황인 만큼, 예상치 못한 일을 겪고 당혹스러워하는 효진 역을 오히려 잘 소화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이 감독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정말 자신이 낳은 아이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내용이었다면 저도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효진이는 종욱이한테 얘를 데려오면서도 자기를 엄마로 생각해달라는 기대도 안 할 것 같았어요. 또, 종욱이 데려오면서 '내가 저 아이의 엄마가 되어야지'라고도 생각 안 했을 것 같고요. 사람 대 사람으로, 가족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데려 와보고 시작한 거였죠."
◇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가족이 되다
극중 효진은 2년 전 사별한 남편을 아직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채 산다. 우울증이 있어 상담을 받기도 하고, 밥벌이였던 공부방도 잘 풀리지 않는 상태.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는다. 외할머니와 떨어지게 돼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종욱을 맡아 달라는. 말이 좋아 제안이지,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압박에 가까웠다.
효진의 절친한 친구이자 곧 출산을 앞둔 미란은 단호하게 거절하라고 조언하지만, 효진은 종욱이 남편 경수(김태우 분)를 좀 닮은 것 같다고 하더니 결국 종욱을 데려오기로 한다. 이미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 심란한 상황에서, 새 식구를 들인다는 가볍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임수정은 이 결정이 관객에게 잘 이해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봤다.
어쩌면 느닷없어 보일 수 있는 결정이, 영화에서 튀지 않게, 그럴 만하다는 개연성을 가질 수 있게 그는 이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2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슬픔, 상실감, 놀람, 외로움, 공허함, 약간의 우울함, 무료함까지 고루 느끼고 있다는 설정은 그래서 필요했다.
조금은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결정이었지만, 종욱과 함께 살며 효진은 조금씩 변한다. 임수정의 말마따나 효진은 영화 초반만 해도 "삶에 아무런 기쁨과 의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종욱과 살면서부터는 소소한 잡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연락 두절이나 가출, 엄마 찾기 등등.
아이러니하게도 이 충돌은 효진에게 생기를 준다. 남편 경수를 중심으로 종욱과 접점을 찾는 계기이기도 하다. 종욱의 엄마를 찾으면서, 자연스레 남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제야 남편을 진짜로 떠나보낸다는 설명이다. 둘은 처음 챙긴 기일에 함께 촛불을 끄며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임수정은 "(종욱이와 살면서) 효진이한테 없던 에너지가 나오는 거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의도치 않은 에너지를 만들어, 한 사람을 다시금 살게도 하는구나 생각했다"고 밝혔다.
◇ 아들 종욱이와는 '친해지고 있는 중'
지난 6일 언론 시사회 때 종욱 역의 윤찬영은 임수정과의 호흡을 묻자 "제가 낯을 좀 가려서 말하는 게 조금 서먹서먹했는데, 이제 저는 많이 친해지고 싶은데 촬영 때의 그게(습관이) 남았는지 힘들더라. 저는 되게 친근해지고 싶고 되게 많이 표현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돼서 걱정"이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제는 좀 더 친해졌느냐는 질문에 임수정은 "꽤 많이 친해졌다"며 웃었다. 그는 "찬영 군은 어떨 때는 진짜 딱 그 나잇대의 소년 같다가도, 종욱이처럼 깊고 성숙한 구석이 있다. 그 두 가지 매력 때문에 캐릭터와 맞았다. 연기도 너무 잘했고"라고 말했다.
대사 핑퐁이 인상적이었던 미란 역의 이상희와 호흡도 무척 좋았다고. 이상희는 언론 시사회에서부터 '임수정의 오랜 팬'이어서 작품을 더 선뜻 수락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임수정은 "저도 배우 대 배우로서 상희 씨에 대한 호감이 있었다. 완전 절친으로 나와야 하는데 연기 호흡이 금방 너무 잘 맞더라. 몇 번만 했는데도. 일단 상희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다. 자유자재로 연기하면 저는 리액션만 하면 될 정도로. 너무너무 애정이 듬뿍 들었다. 다음에도 꼭 같이 연기하고 싶다. 좋은 동료를 만난 느낌"이라고 전했다.
(노컷 인터뷰 ② '천만 배우' 꿈꾸는 임수정, 독립영화 꾸준히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