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탄생한 KBS-MBC 사장들은 대부분 내부 구성원들의 지지나 신뢰를 받지 못했다. 유난히 파업이 잦았던 이유다. 이젠 더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컸다. 더구나 국정농단 사태 때 언론을 향한 시민들의 질타는 매서웠다.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언론을 비판했다.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 현재 시급한 '적폐청산'과 '조직 혁신'을 해낼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여론'이 됐다.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는 그동안 '밀실'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사장 선임 과정을 페이스북 라이브 등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했고, 후보 중 가장 개혁적인 성향으로 꼽혔던 최승호 MBC 해직 PD(사장 취임 후 복직)를 사장으로 뽑았다.
두 배가량 더 긴 파업을 했던 KBS는 시민자문단을 도입했다. 각 후보의 정책 발표와 토론을 들은 시민들은 배점을 매겼고, 합산된 평가는 40% 반영됐다. '국민의 방송'을 자처하던 KBS에서 시민 의견을 구해 사장을 뽑은 것은 최초였다. 정연주 전 사장 불법 해임 사태 등 정권에서 시작된 언론장악에 맞섰다는 평가를 받는 양승동 PD가 사장이 됐다.
KBS와 MBC는 '변화'를 약속하며 파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관리감독기구의 인적 구성도 현재 여권이 우세한 방향으로 재편됐고, 무엇보다 수장이 바뀌었다. 정권이든 자본이든 외압에 휘둘리지 않는 건강한 고품질의 언론이 되길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을, KBS-MBC 새 수장은 과연 잘 구현해 낼 수 있을까. 21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대학교 국제관에서 열린 '2018 한국방송학회 봄철 학술대회'의 특별대담은 두 사장의 각오와 약속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 정권에 종속적이었던 과거의 공영방송, 현재는?
이날 사회를 맡은 박홍원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현재 공영방송 지배구조 △방송법 테두리 안에서의 공영방송의 제도 개선 방안 △사회단체 대표가 공영방송 이사회에 포함될 수 있는지 △청와대와의 관계 설정 △안정적 재원 마련 △자사 조직문화 진단 및 회복 방안 등의 주제로 질문을 던졌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가장 많이 지적됐던 언론의 속성이 '정권 편향성에서 나오는 불공정성'이었다. 더 무거운 공적 책임을 지고 있는 공영방송의 형편이 더 나빴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 용산참사, 4대강 사업, 천안함 사태, 내곡동 사저,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부활, 한일 위안부 합의, 국정농단 사태 등 정권에 민감한 이슈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충분한 수준으로 보도되지 못했다. 현재 청와대와 공영방송의 관계는 어떨까.
MBC 최승호 사장은 양대 공영방송 사장을 선임할 때 외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청와대와 방송과의 관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정상적인 관계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사장은 "현 정부 자체가 언론의 파행 때문에 피해를 당한 언론인들과 일종의 공감을 가진 정부라고 생각한다. 2012, 2017년 대선 때도 공영방송 복원과 독립을 주요 공약으로 내놓은 정부다. 그런 측면에서 현 정부에서는 언론을 장악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을 거라고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러면 제가 언론사 사장으로서 청와대를 대하는 입장과 태도는 어떤가. 충분히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최 사장은 사장직을 마친 후 다시 저널리스트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한 것을 들어 "그런 면에서 앞으로의 관계는 굉장히 건강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양 사장 역시 KBS이사회에게 KBS 사장 선임 과정에서 청와대의 영향력 행사는 없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청와대에서 반민주적으로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안 하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정권 속성이 변했을 때가 우려된다"며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제도화해야 하는데 방송법을 통해 선임 과정 자체를 바꾸는 것을 많이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양 사장은 보도·시사 영역의 국장 임면동의제와 방송법상에 나온 편성위원회 정례화를 제시하며 "이걸 내부적으로 제도화하면 상당한 정도로 자율성을 갖고 (외부 세력으로부터) 독립해서 (방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 앞으로 KBS-MBC는 시청자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최근 10년간 KBS-MBC는 구성원들이 제작자율성과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상처 입은 조직을 되살려 제 기능을 하게 만드는 것 역시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최 사장은 "제가 86년에 들어갔는데 전두환 정권이었음에도 MBC 문화가 그렇게 강압적이지 않았다. 나름대로는 선배들이 후배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부분이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1987년에 노동조합이 생긴 이후로 상황이 나아져, "자율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내부 조직 문화가 있었다"는 게 최 사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최 사장은 "그 속에도 나름의 모순은 있었다. 권력이 본격적으로 MBC를 장악하기 시작했을 때 권력과 손잡는 무리가 (내부에) 생겨났고, 그게 지금 조직문화에서 굉장히 큰 상처로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최 사장은 세월호 참사 오보를 비롯해 최근 MBC 정상화위원회가 사실상 조작이라고 발표한 안철수 2012년 당시 대선 후보의 논문 표절 보도 등을 예로 들며 "이런 부분에 대해 여러모로 어려움을 갖고 있고, 긴 시간 동안 바로잡아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양 사장은 노사 갈등, 노노 갈등 등을 염려한다면서도 "제작자율성 위축 및 정권의 장악 시도에도 끊임없이 부당하다고 외치고 싸운 과정을 10년 거쳤다. 촛불 혁명을 통과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장 선출한 것에 대한 공유된 인식과 경험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더 많아졌다"며 "거기서 에너지가 나와 (앞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을 위해 어떤 것을 할지 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 달라는 질문에 양 사장은 "파업 과정에서 각 직종, 구역별로 상당히 합의된 것이 바로 '제작자율성 보장'"이라며 "보도·시사 부문 국장은 구성원들의 동의를 기본 전제로 해 제작자율성을 보장하겠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얘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자신은 큰 틀에서의 경영을 맡고 9시 뉴스 등 아이템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최 사장은 "보도 제작자율성을 보장하는 측면은 이미 완벽하게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같았으면 뉴스 큐시트를 (사장이) 받아보고 순서를 바꾸거나 이건 빼라고 얘기를 했을 것"이라며 "저는 지금까지 큐시트라는 걸 본 적이 없다. 갖고 오지 말라는 얘기도 안 했는데 자기들이 안 가져오더라"라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특정한 보도에 대해 사장이 평가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