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삼성이 미국에서는 반도체 생산라인의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고 있어, 이같은 입장은 '이율배반'일 뿐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 삼성 반도체의 '속살' 담은 보고서 공개, 늦어지는 이유는?
산업통상자원부는 16일 국가핵심기술 판정을 위한 산업기술보호위원회 반도체 전문위원회를 열고 문제의 보고서에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됐는지 심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6개월마다 공장별로 노동자들이 유해인자에 노출될 가능성 등을 평가해 고용노동부에 제출하는 서류로,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이 산업재해를 증명하기 위한 핵심 증거로 꼽혔다.
그동안 노동부와 삼성전자는 기업 영업비밀을 담고 있어 공개할 수 없다거나, 작업환경을 측정하지 않았다거나, 주요 내용을 삭제한 채 공개하는 등 온갖 이유로 보고서 전문 공개만은 계속 가로막았다.
하지만 지난 1월 대전고등법원이 삼성전자 온양공장의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판결내렸고, 보고서 공개를 거부하던 노동부도 지난 2월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삼성은 보고서를 공개하면 그 안에 담긴 국가핵심기술을 포함한 영업비밀까지 업계에 유출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삼성은 반도체 분야 7개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는 내용이 보고서에 담겼다며 산자부에 확인을 신청했다.
이 외에도 수원지방법원에는 행정소송 및 공개금지 가처분 신청을,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는 행정심판을 제기하는 등 보고서 공개를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당 기관들은 320여명의 직업병 피해 제보자, 118명의 사망자를 낳은 삼성전자 직업병 논란과 한국 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위상 사이에서 줄타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양새다.
산자부 뿐 아니라 수원지법도 지난 13일 첫 심리에서 삼성의 가처분 신청에 대한 판결을 유보했고, 중앙행정심판위원회도 17일로 예정된 행정심판 청구 결과 발표를 연기했다.
향후 반도체위원회와 행정소송, 행정심판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보고서에 영업비밀이 담겨있다는 삼성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특정한 정보의 영업비밀 여부는 개별 기업이 결정하지 않는다. 이는 관련 법에 따라 법원이 판단해야 하고, 이에 대해 법원의 가장 최신 판결은 보고서의 정보가 영업비밀로 보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현재 삼성은 "보고서에 공정간 배열이 기재돼 있고, 배치된 설비의 기종 및 보유 대수, 배치, 사용 화학물질의 종류와 사용량도 확인할 수 있다"며 영업비밀이 유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해당 보고서에는 단순히 라인명과 공정명이 기재됐을 뿐, 실제 작업과 직결되는 공정간 배열은 기재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또 각 생산라인에 배치된 노동자 수, 노동형태 등 외에는 배치된 설비의 기종 및 보유대수, 생산능력, 설비배치, 공정 자동화 정도, 인건비 관련 자료, 각 공정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사용량․구성성분 등도 기재되지 않는다.
법원은 작업환경보고서에 있는 핵심 정보인 '단위작업장소별 유해인자의 측정위치도'에 대해 "공장의 개략적인 도면 위에 유해인자 등의 측정위치를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며 "관련법의 '법인 등의 경영상·영업상 비밀'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측정위치도와 다른 정보를 대조해보아도 삼성 측이 우려하는 영업비밀이 알려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삼성은 "사업 초기 기초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소소한 정보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법원은 "근로자의 생명․신체․보건과 직결된 정보로서 공개되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다"며 노동자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정보가 공개되야 할 필요가 더 크다고 이미 반박했다.
2014년 당시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유해화학물질에 관해 정보공개를 요청하자, 텍사스 주 정부는 전산화 작업이 완료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관련 정보를 공개했다.
텍사스 주 관련 법에 따르면 미국 환경청이 정한 기준치 이상의 유해화학물질을 보관하고 있는 기업이 이를 관련 기관에 해마다 제출해야 하고, 이 자료를 일반 시민도 요청해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업비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도 삼성전자는 2016년 11월, 2017 상반기까지 오스틴 반도체 공장에 1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비록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뇌물 사건에서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돼 투자가 일시 중단됐지만, 지난해 6월 실제 투자도 마쳤다.
삼성전자의 미국과 한국 간 '차별 정보 공개' 의혹에 대해 2015년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만난 자리에서 반올림 측이 지적한 바 있다.
이 때 삼성 측은 "오스틴과 한국 모두 거의 동일한 물질과 작업방식을 사용하고 있고, 두 나라 모두 관련 화학물질을 신고하도록 됐다"고 해명했다.
또 "관련 법에 따라 해당 기관을 통해 관련 정보를 받을 수 있다"며 "다만 양국법 체계상 (공개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법에 따라 성실히 정보를 공개했지만 한국 법에 따라 정보 공개가 제한됐을 뿐이라던 삼성이 정작 한국의 법원과 정부가 보고서를 공개하려 하자 반발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것이 직업병 피해자들의 지적이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는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물질인데 영업비밀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삼성이 미국 텍사스 공장에서 공개할 때에는 그 나라 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며 "지금은 한국 법원과 노동부가 공개하려 하자 막아서는 이중적인 모습은 어느 나라 법인지 의문 "이라고 비판했다.
또 삼성이 산자부와 법원, 권익위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대해 "영업기밀 여부 조사로 시간을 끌어 피해자들이 적절한 시기에 산재 입증을 하지 못하게 된다"며 "만에 하나 수년 전 기술이 공개되더라도 해마다 관련 기술이 개선된다고 홍보하면서 과연 얼마나 큰 손해를 입을 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미국 텍사스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대형 위험사고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Tier 2 리포트'로 보고서와 성격이 달라 영업비밀 사항은 제외된다"며 "한국에서도 화학물질관리법에 의해 관련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명했다.